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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응 열사의 기념비는 서울 장충단공원에 있다. 아래 앨범을 같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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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충단공원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일성이준열사동상, 순국열사이한응선생기념비, 외솔 최현배선생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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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응 묘소 지정번호 : 용인시 향토유적 제 49호 /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덕성리 산70-1 이한응 열사(1874~1905)의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이며, 본관은 전의(全義)로서 용인시 이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였다. 현재 묘소의 위치는 이동면 덕성리 산70-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5년도에 설치한 상석과 촛대석, 곡담, 묘비가 있다. 그리고 전해오는 유품으로는 친필 유서, 일지, 유방첩 등이 있다. 16세 때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는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28세 때인 광무 5년(1901) 3월 주한 영국, 벨기에 양곡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부임하였다. 광무 6년(1902)에는 공사 민영돈이 귀국함에 따라 특명 서리공사로 임명되었다.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있는 동안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기울어져가는 대세를 일개 청년 외교관의 노력만으로 돌이키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광무 9년(1905)(음) 4월 9일 유서를 남기고 타국 땅에서 순절하였다. 방년 32세였다. 이한응 열사의 순절은 국내외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 국내에서는 고종황제가 제문을 보내어, 일본의 강압적인 한일신약(韓日新約) 체결로 인해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음을 슬퍼하였다. 또 황성신문을 통해 그의 순절 소식이 전하여져 많은 애국지사들이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조문하였다. 이로부터 7개월 후 민영환 선생이 순절하였으며, 2년 후 이준 열사의 헤이그에서 순절이 이어졌다. 이렇게 한말의 입절한 여러 순국열사 중에서 범(範)을 보였다는 점에서 선생의 순절은 더 한층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선생의 유체와 유품을 보내온 주 런던 영예총영사 마겡톤의 편지를 통해 볼 때 그가 타국의 외교관들에게 눌리지 않고 대한제국의 위상을 드높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공사의 유해는 광무 9년 7월 고향인 용인에 안장되었으며,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內部協瓣)에 추서되어 장충단에 배향되었다. 해방 이후 순국열사 이한응 선생 추모회가 만들어져 유사(遺史)가 간행된 바 있고, 그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