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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경신학교(언더우드 설립) 재학시 배영회라는 독서 토론회를 조직 항일 활동을 하심. 1910년 졸업식에 태극기 게양이 안되자 졸업식 불참을 주도하심. 잠시 관직생활을 하심. 안도산 이월남 윤치호 3분을 선생님으로 섬기며 국내외 선후배들과 서울에서 항일운동을 하심. 일경은 요시찰인으로 분류하고 국내외 독립운동정보를 캐내기 위하여 집요한 사찰을 하여 금어리 집으로 낙향하심. 1919년 2월 하순 고하 송진우 학형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상경하여 3.1독립선언 거사에 참여하심. 민족대표 33인의 태화관 독립선언식과 파고다공원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일경을 피해 금어리 집으로 피신하심. 포곡 인근의 뜻을 같이 하는 홍종엽 권종목 이인봉 김치현등과 연대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논의하고 3월 28일 거사일로 정함. 거사 당일 홍종엽과 함께 금어리 주민 200여명을 규합하여 귈기를 하였고 삼계리 대대리 등 시위대와 합세하여 용인 읍내로 진출을 시도하였음. 긴급 출동한 일경의 발포로 시위대는 사상자를 내고 해산됨. 일경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10개월간 복역하심. 출소후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활동을 유지하심. 해방후 민족이 남과 북으로 분단된 것을 안타까워 하셨고 하루빨리 민족통일이 이루어 지기를 염원하셨으며 1967년 10월 21일 74세를 일기로 타계하심.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서 받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