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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원은 경기도 죽산(竹山) 출신이다.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비밀리에 교환된 각서에 의하여 한국군마저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정황하에서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정주원은 8월에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하사리(龍仁郡 遠三面 何寺里)에서 자진하여 의병에 투신하여 30여 명의 동지를 이끌고 양지(陽智)·양성(陽城)군을 중심으로 의병 모집에 힘써 동지 150여 명을 규합할 수 있었다. 아울러 총기·탄약 등 무장을 갖추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각 부서를 정하고 거병하였다. 8월 25일 안성(安城)에서 개최된 의병회의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참가하였다. 이때 7개 의진 일만여 명의 의병이 모였다. 그러나 의견 불일치로 의병 합진 내지 연합전선 형성에 실패하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9월 이후 죽산·양지 등지에서 의병장 임옥녀(任玉汝) 부대와 합진하고 의병 소모활동을 전개하여 부하 9백 여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정주원은 전 부대를 3부대로 나누어 자신은 그 중 1부대를 인솔하고 수원군 수하(水下) 방면에 출동하여 수원·안성·양지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나머지 2부대는 양지·죽산의 경계에 배치하여 활약하도록 하였다. 11월 한진(漢津)에서 배를 타고 고온포(古溫浦)에 건너가 충청도 당진(唐津)·풍도(豊島)·면천(沔川)·서산(瑞山)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의병 50명을 인솔하고 당진 주재소를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2월에 다시 안성·양지·죽산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죽산군 능촌(陵村)에서 일본군 15명과 교전하였다. 4월 양지군 사동(寺洞)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며, 용인군 요봉골(料鳳谷)에서 적과 교전 끝에 부상자 1명을 내었다. 4월 25일 다시 당진으로 건너가 재기를 꾀하였으나 적과의 접전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일시 부하를 해산하였다. 1908년 7월 19일 오전 8시경 충청도 해미군(海美郡) 적서촌(赤鼠村)에서 2척의 선박으로 입항할 때에 신호 잘못으로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추격 당하던 끝에 체포되고 말았다. 9월 29일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11월 24일 종신유형에 처해졌다. 또한 비교적 오랫동안 많은 부하들과 활약하였으므로 그의 부하들 중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인물이 많았다. 신현구(申鉉九)는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안춘경(安春京)은 징역 7년형, 손응현(孫應鉉)·김사근(金士根)은 징역5년형, 송교원(宋敎源)은 3년형, 박덕삼은 2년형 그리고 이상덕(李相德)은 15년형의 유죄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