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page


39page

의 주식 모집원으로 가장하여 전남 각지에서 많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보내었다. 지사는 다시 신덕영 노기준과 같이 전남 담양군 및 곡성군에서 군자금 모집에 진력하던 중 동년 11월 5일 노기준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광주로 가던 도중에 일경에 피체되어 1921년 5월 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의 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6년 출감 후 귀향하여 부친은 4개월 전에 별세하였고 가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그 형편은 말할 수 없었으나 조국 광복을 위하여 몸을 바친 지사는 불고가사하고 고국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여 중국 산서성 태원부에서 한창남 이용화 김정연 등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공명단을 조직한후 단장에 피선되었다. 1927년 안창남 신덕영 김정연 등과 북만에서 독립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그 기금모집과 서울에 공명단지부를 설치하고자 김정연 이선구등과 같이 1929년 4월 서울에 잠입하여 첫번째 행동으로 동원 20일 지사는 김정연 이선구와 함께 서울교외 망우리에서 강원도 춘천으로 가는 일부편물 수송차를 권총으로 습격하여 정차시켰다. 그리고 지사의 일행은 차 속에 실었던 우편낭을 뒤져 많은 돈을 빼앗은뒤 일인의 우편물은 전부 불태워버리고 동포의 우편물만 남겨두었다. 이때 이곳을 지나던 자동차를 모조리 정지시킨 후 운전수와 승객들의 눈을 가리고 산골 속으로 끌고가서 열파시키니 그 수효는 10명이었다. 이같이 산 밖으로 정보가 새지 않게 한 후 지사의 일행은 행장을 수습하고 강원도쪽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뒤미쳐 이 급보를 받은 일경은 경기 황해 강원 충북 충남 등 5도의 일경과 일군 제19사단의 응원을 얻어 천마산 양주를 포위하매 지사의 일행은 이를 상대로 전투를 시작하여 망우리고개와 마치고개를 넘나들면서 일주야를 악전고투하였으나 탄환은 떨어지고 배는 곺아 제궁력진하여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 후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간의 예심을 거쳐 지사는 징역 10년의 언도를 받고 김정연은 징역 9년 이선구 징역 6년의 언도를 받아 서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