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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陽山水와 比較하여 龍山의 山水를 詳細히 기록하고 아울러 龍山의 往昔人物과 遺蹟들을 紹介하면서 역시 詩로써 끝을 맺었다. 그러면서 先生이 他關에서 生을 마치려 한 것은 무슨 뜻일까. 어쨌던 時代에 대한 不遇의 심정에서 일치감치 安心立命의 자리를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先生은 老境에 이르기까지 憂國一念이 지극하였다. 八十歲에 肅宗임금의 求言에 應하여 其命維新箴과 함께 疎를 올렸다. 내용은 社會秩序를 바로잡고 民間의 奢侈를 追放하고 國家財用을 節約하라는 등 五個項과 아울러 科擧의 末幣를 力說한 것이다. 八十三歲 즉 그의 卒年에 再次 上疏하였는데 거기에서는 王이 勤와謹和緩 四字로써 行政의 要諦를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緩에 대한 설명에서 “緩以實之”라 하여 당시의 拙速行政 내지 形式主義 行政을 批判하고 그 是正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先生의 衷誠어린 進言에 對하여 王은 儀禮的으로 賞을 내리고 批答을 주었을 뿐, 實地로 받아들여 大改革에 着手할 엄두조차 못 냈던 것이다. 先生은 결국 其命維新을 보지 못하고 奄然히 手足을 거두어 夫人이 묻힌 永東 深源村으로 大歸하고 말았다. 이것이 一六九三年 陰曆 4月이었다. 先生의 一生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면서 짧은 頌辭로써 銘에 대신해둔다. 산높고 물맑은 이 고장, 八松先生의 거룩한 風儀, 이 누리 이어지는 날까지 길이 우러러뵈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