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page


80page

儒賢이 나와 講學의 傳統을 심어놓았고 里人의 美가 좋은 環境을 이루어 先生은 幼少年時節 남다른 培養을 입었다. 十六歲 때 梧溪 曺公 挺立에게서 공부하가가 二十歲 때에 桐溪 鄭蘊 先生을 정식으로 師事하였다. 이때 桐溪는 親喪을 당하여 龍山에 廬墓生活을 하고 있었으므로 先生은 가까이서 그 門下에 드나들면서 受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居昌에 와 있었던 龍洲 趙絧 先生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龍洲는 한때 中央政界를 떠나 멀리 居昌에 寓居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 시골에서 生長한 先生이 이와같이 一國의 丈席 두 분에게 직접 薰陶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준 機會였다. 이리하여 文章과 學文이 日就月將한 先生은 또한 卓犖한 氣槪와 抱負를 지녔다. 伽倻山 頂上에서 지은 “左手掃天雲 右手奉天月”이라는 詩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것이 二十歲 때의 作이다. 二十三歲에 長水의 韓氏댁으로부터 夫人을 맞이하는 한편 陜川監試 兩場에 壯元을 하고 드디어 蓮榜에 올라 進士가 되었다. 名聲이 날로 높아지고 鄕黨長德의 囑望이 점차 커졌다. 一六三六年 그의 二十六歲 때의 「龍山泛菊會序」는 특히 有名한 글이다. 泛菊會는 仁祖 丙子年 九月 九日에 龍山 落帽臺에서 開催된 文會로서 桐溪先生을 筆頭로 曺梧溪 挺立, 林林谷 眞怤, 申妙亭 順蒙 등 무려 五個郡에서 十八名의 名士들이 集合하여 近古에 드문 盛會를 이루었다. 이 자리에 最年少者로 참여한 先生은 勝王閣의 王勃과 같이 四六文으로 긴 序辭를 지어 많은 사람들의 擊節讚賞을 받았다. 落帽臺는 東晉의 龍山宴席에서 孟嘉가 落帽한 風流故事를 본떠서 같은 龍山인 이곳에 이름지어진 것이지만 당시에 모인 名士들의 韻致와 함께 先生의 이 長文의 序辭는 길이 後代에 전해온다. 그러나 先生은 이런 聲華에 조금도 만족하지 않고 더욱 硏鑽에 專念하여 事親接人하는 가운데서도 마음과 눈이 書冊에서 떠나지 않았다. 三十五歲에 乙科 第一人으로 文科에 合格하여 靑雲의 길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假注書로 出發하여 司宰監⦁廣興倉⦁內贍寺⦁司贍寺⦁의 奉事⦁直長 등 中央各司의 末端官僚로 轉傳하였다. 朝鮮王朝는 仁祖反正과 더불이 畿湖 西人이 政權을 壟斷하여 嶺南 쪽에 宦路가 잘 열리지 않은데다가 先生은 朝廷에서 接引해 주는 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龍洲가 先生의 文章을 높이 評價하고 白軒 李景奭이 先生의 文行雅操를 欽歎했지만 별로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三十七歲에 母喪으로 歸鄕했다가 服闋 후에 成均館典籍, 沙斤道察訪, 禮曹佐郞을 歷任했으나 父親의 別世 후에 더욱 世念이 稀薄하였다. 先生은 一六五一年경부터 鄕里에 대한 關心이 짙어져서 茅溪의 子弟인 石峰 文誠後와 함께 八松齋를 重修하고 거기에서 茅溪가 남긴 講學의 遺風을 다시 振作시켰다. 많은 弟子들이 登門請業하면서 先生을 八松先生으로 稱號하게 되었다. 그 뒤 朝廷에서 다시 몇 차례 불러올렸으나 항상 禮刑曹의 郎官이거나 奉常寺僉正 따위에 맴돌고 있었으므로 先生은 그때 그때 잠시 나갔다가 곧 棄歸하였다. 그러다가 五十五歲에 丹陽郡守로, 五十九歲에 蔚珍縣令으로 除授되자 欣然히 應命하였다. 첫째 專城之長으로서 民政을 所信대로 施行해보려 한 것이고, 둘째 두 고을 山水烟霞로 소문난 곳이어서 雅懷를 한번 풀 수 있기 때문이다. 瓜期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醴泉을 지나다가 金塘谷에 그대로 눌러앉아 그곳에서 餘生을 보내기로하였다. 先生은 平生 龍山을 사랑하여 外處에 나가 있을 때 항상 애틋한 懷鄕의 情을 詩로써 노래하였다. 「望鄕山有思」와 「龍山二十六詠」이 그 代表的인 것이다. 특히 丹陽에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