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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고장이 낳은 十七世紀 당시 嶺南右道의 先學 宿儒 鄭八松 先生을 紀念하는 崇碑를 세운다. 今年은 先生의 逝世 三百周年이 되는 해로서 居昌 人士들이 뜻을 모아 先生의 學德을 되새기고 자라나는 後生들의 敎化에 도움이 되고자 함에서다. 이 事役이 시작 될 무렵 先生의 後孫 鄭尙鎬⦁鄭載成, 從後孫 鄭載哲 諸氏가 同鄕인 金東漢氏와 함께 佑成을 찾아와 여러 人士들을 趣旨를 傳하면서 碑文을 請하기에 佑成 또한 同省의 한 後進으로 敬仰의 뜻에서 이 글을 草한다. 先生의 諱는 必達이요 字는 可行이며 八松은 그의 號이다. 晉陽을 本貫으로 하는 이 鄭氏는 嶺南의 大姓으로 歷代에 걸쳐 達官明碩이 많았다. 高麗初의 兵部尙書 鄭臣烈과 禮意判書 鄭愈를 爲始하고 高麗末 朝鮮初에 木棉業의 發達에 크게 기여한 判府事 鄭天益이 모두 先生의 直系祖上이다. 代代로 晉州牧 管下인 召南里 白也洞 등의 마을에 살다가 先生의 高祖父 鄭碩佑에 이르러 三嘉로 옮겼고 曾祖父 鄭房이 비로소 居昌으로 入鄕하여 龍山에 터를 잡고 龍隱으로 自號하였다. 龍山은 옛 加祚懸의 中心地로서 山中이면서 넓고 기름진 田野가 펼쳐 있고 北川과 東川이 合流하여 水源이 좋으며 마을 앞 솔숲은 한층 京觀을 더해주어서 실제 勝地名區라 할 수 있다. 龍隱이 이곳을 擇한 것은 장차 그의 後承에 훌륭한 人才가 孕育될 것으로 내다보았던 慧眼에서 온 것이지만 또한 그의 丈人 曺彦明의 사정에 따른 것이다. 曺彦明은 南冥先生의 叔父로서 龍山에 살고 있었는데 後嗣가 없어 家業을 外孫에게 傳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鄭氏家는 龍山을 보금자리로 振振한 子孫을 길러왔다. 一六一一年 光海 三年 辛亥 陰曆 四月에 父親 諱浚과 母夫人 咸陽朴氏 사이에 長男으로 出生한 先生은 天稟이 瑩粹沈靜하고 총명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七歲 때 普海寺에서 “平林落葉埋春色”이라는 一句가 있었고 十三歲 때 晉州先塋을 拜謁한 뒤에 남의 詩에 次韻하면서 “白村南畔橋猶在 題柱人歸記得無”라는 絶句一首를 남겼다. 그야말로 出語驚人인 동시에 자기 스스로의 긍지도 대단하였다. 龍山에는 이미 茅溪 文緯 先生과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