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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소매속에 가지고 있던 자귀로 목을 찍어 순절하니 참으로 장렬하도다. 이때가 기미년 정월 초하루였고 향년 66세이다. 왜경의 급보로 일가 문중이 급히 정자에 가니 백일도 빛을 잃고 하늘이 눈을 내렸으니 천지신명도 의사의 순절을 애도했음인가 반구할 때 원근에서 조문통곡하는 사람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만장과 제문이 권질을 이루었으며 정월 15일 성인봉 아래 곤좌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78군의 선비들이 운집하여 그 묘에 조선의사 합천이공의 묘라고 썼다. 장사를 지낸 뒤에 사람이 발기하여 성암사라는 사당을 세워 두 선생과 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장판각을 세워 연제 선생의 유사 및 문집의 판본을 소장하였으니 이는 모두 항일정신에서 비롯된 誠心所到(성심소도)였다. 배위는 영천이씨인데 공보다 먼저 돌아갔고 사위는 박노학 최병환 이애원이며 아우 태환의 아들 제기를 계자로 삼았다. 공은 천부의 재능을 타고났고 또 위기의 바른 학통을 배워 벼슬없는 선비로서 충성이 금석을 꿰뚫었고 나라가 무너지고 주상의 붕어를 당하여 죽음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우국단충을 깨닫게 하고 3.1독립운동의 촉진제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미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공이 순절한지 근 80년이 된 지금 광복 50주년을 맞아 향당 사림과 지방 유지 제언의 衷心捐助(충심연조)와 당국의 특전으로 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침류정 경내에 사적비를 세우니 이 또한 후세사람들이 의사를 추모하는 길이리라 나에게 와 비문을 청한 사람은 추모사업추진원회와 합천이씨 문중이다. 원래가 단필이라 사양했으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이에 행장과 묘갈 등을 참고하여 이와 같이 서문을 붙이고 명을 짓는다. 이 거창고을에 침류정이라는 정자 있어 의사의 핏자국이 천추에 길이 남으리라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여 죽어서도 인륜의 모범이 되었으니 열열한 그 정신은 일월과 빛을 다투누나. 한수레타고 저승길로 선사와 함께 돌아가 천하의 참된 도리 세우니 빛나고 빛나는 업적이로다. 정부에서 늦게나마 건국훈장 애국장을 드리고 선비들 輿論嚴正(여론엄정)하여 이 우뚝한 비를 세우도다. 내 붓 阿諂(아첨)함이 없이 크게 넓게 여기 새기노니 의리를 배반한 모든 무리들 여기 지나면서 이마에 땀을 흘리리라 광복 후 첫 을해년 윤 8월 일 합천이씨 문중에서 우리말로 옮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