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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痛憤) 끝에 지리산 산청 덕산에서 창의(倡義)한 박동의(朴東義) 경남창의대에 참여 부장(副將)으로 맹활약하였다. 공은 이때 산청 하동 함양 합천 진주 사천 등지에서 박동의 창의대장(倡義大將)과 함께 1000여명의 의병을 모아 부대를 편성 1907년부터 이학로 양문칠 류명국 박인환 이차봉 이만용 황의중 황내청 김경삼 장석현 서병희 우수보 등과 함께 지리산(智異山) 부근 일본군 수비대 10여 개소를 공격 항일의병(抗日義兵)의 기개를 드높였고 이듬해 3월 26일 의병 50여명을 이끌고 당시 일본경찰이 주재(駐在)하던 산청경찰서와 군청을 습격하여 불태웠으며 4월 16일 단성경찰서를 전소(全燒)시켰다. 또 6월에는 80여명의 의병진과 함께 지금의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본군 입석수비대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가했다. 이어 8월 26일에는 의병 30여명으로 무장하고 일본군 하동수비대(河東守備隊)를 기습 공격했다. 공은 뛰어난 책략으로 일본군과 30여 차례 치열한 격전을 치렀지만 「의병」이라는 태생적 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분투 하다가 1909년 11월 11일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 월횡에서 교전 중 휘하 의병 13명과 함께 전사 순국했다. 공의 나이 31세였다. 이후 의병들은 공을 옥종면 산중에 가매장 하였다가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선영이 잇는 산청군 삼장면 대하리 다간마을 뒷산에 안장했다. 공의 아들은 형제로 장남은 원규(元圭)이고 손자는 종수(鍾洙) 종오(鍾吾)이며 차남은 문규(文圭)이고 손자는 종태(鍾泰)이다. 장차 공훈비(功勳碑)를 세움에 손자 종태와 종손자 종호(鍾浩) 재당질 용규(埇圭) 의병장 조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