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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것을 기회로 일본은 병력으로 조정을 위협하여 국가사직이 풍전등화 같음을 깨달은 공은 민족을 구하려는 큰 뜻을 품고 전국에 통문을 돌려 왜적과 싸울 것을 호소하고 적수공격으로 의기를 높이 들고 의병을 모집하여 원주를 거쳐 강릉에서 관동구군 도창의소를 설피하고 창의대장에 추재되어 1년여에 걸쳐 왜적과 싸와 수천여명을 격살하면서 전신에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고종의 해병칙서로 울분을 참고서 의병을 해산하고 중국으로 들어가 천진 여순 등지에서 대도독 원세개와 북양대신 송경 등을 접견하고 한국의 실정을 들어 설득시켜 원조을 청했으나 미묘한 국제정세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제의 소환칙령을 받고 귀국하여 1899년에 황명으로 국적없이 만주에 거주하는 우리 유민 10만명을 수적시키다. 경자년에 희릉참봉이 되고 임인년에 강릉 명성황후 천릉도감을 배명하였으며 계묘년에 비서원승지에 서임되 통정직에 올으다. 그러나 공은 당시 국가존망의 위기를 극복코저 친일파벌들과 투쟁하였으나 드디어 을사 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를 비분통탄하고 즉시 관직을 사퇴 다시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혈투 중 총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불구의 몸으로 낙향하여 투병 중 불행이 1922년 임술 4월 24일에 33세를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한스런 일생을 마치었으니 그 충성은 비할대 없도다. 조국의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훈장인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배는 숙부인 하동정씨로 의관 정낙효의 딸로서 영욱 영옥 영원 3형제를 두었고 영욱이 남식 종식 수식 대식을 생하고 영옥이 원식 도훼 구은 석을 생하고 영원이 국재를 생하였으며 남식이 병우 병선 병창을 생하고 종식이 병소 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