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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 며 장차 있을 의병재기항전의 기반을 다졌다. 이때 그는 박상진(朴尙鎭), 민긍호, 이강년 등 의 쟁쟁한 인물들과 사귀면서 뒷날을 기약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박상진과는 특히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3) 이 즈음 신돌석은 많은 일화를 남겨, 그의 강렬한 우국충정과 철저한 항일정신을 짐작케 한다. 그 가운데는 청도지방을 지나면서 일군들이 전선부설작업을 하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 하게 되자, 적개심을 누르지 못해 일군이 세워 놓은 전주를 뽑아 버리고 단숨에 일군 공병 4, 5명을 처치하였다는 이야기라든지, 부산항에 정박중인 일선(日船)을 그대로 뒤집었다든 지 하는 이야기는 유명하다.4) 그뒤 일제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어 1905년에는 실질적인 국망을 예견하는 을사오조약이 늑결되기에 이르렀다. 이 즈음 신돌석은 국운이 날로 기울어 가는 것을 보고 의분에 찬 나 날을 보내던 중 평해 월송정(月松亭)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울분을 토론하며 의병 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누(樓)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 낙목(落木)이 가로 놓인 조국을 탄식하네 이칠(二七) 남아 이룬 일이 무엇인가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나는구나5) 신돌석은 드디어 1906년 3월 13일(음력) 향리인 영해 복평에서 1, 2백여명의 장정을 규 합하여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6) 그는 이때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 쓴 대장기를 앞세 우고 의병항전을 시작하였다. 일찍이 자수성가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던 그의 부친은 이즈음 전답(田畓) 등의 전재산을 매각하여 무기와 군량 등을 구입하는 등 열성적으로 의병을 후원 해 주었다고 한다. 영해군수로 있던 경광국(慶光國)은 신돌석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만류하기 위해 찾아 왔으나, 그를 만난 뒤로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신돌석의 의기는 누가 감히 그르다 하리오마는, 단 독단으로 군사를 마음대로 취급하므로 내 이것을 제지하려 한 것 뿐이다. 그러나, 그의 안광이 횃불과 같고 다리의 힘이 바다라도 뛰어넘을 듯한 용기를 가졌으니 참으로 장군이로다.7) 라고 하여 신돌석의 인물됨을 극찬하였다는 것이다. 신돌석은 휘하 의병들을 거느리고 군대동(軍大洞)에 이르러 부근 여러 고을로 의병을 모 으기 위한 격문을 돌렸다. 이에 그의 명성을 듣고 많은 장정들이 의병에 투신해와 신돌석 의병부대는 일시에 의성(義聲)을 울리게 되었다. 신돌석 의병은 영해 부근에 주둔해 있던 일군을 격파한 뒤, 4월(음력)에는 울진 장흥관 (長興館)으로 올라가 정박중이던 일선(日船) 9척을 격침시키기도 하였다. 그뒤 신돌석 의병부대는 삼척, 강릉, 양양, 간성, 원주 동해안을 주무대로 한 강원도 일대 에서 일군 및 관군과 격전을 벌여 많은 승첩을 거두었다. 특히, 신돌석의 용맹은 일군들에 게도 널리 알려져 그 이름만 듣고도 감히 접근조차 못했다고 한다. 그해 11월 신돌석은 일월산(日月山), 백암산(白岩山) 부근으로 남하해 이강년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11일 신돌석, 이강년 두 의병부대는 연합해서 순 흥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대구로부터 일군 적사(赤司)부대가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대거 이곳으로 진격해 오자, 신돌석은 신속하게 울진 방면으로 옮아갔다.8) 신돌석은 1907년 11월 이인영, 허위 등이 주축이 되어 전국의병의 연합체인 13도창의군 이 결성되었을 때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에 임명되기도 하였으 나, 그는 이에 합류하지 못한 채 영남 일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9) 1907년 겨울 동안 일월산 등지에서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가다듬은 신돌석 의병부대는 , 이강년 부대가 경기지역으로 북상하고 난 뒤, 1908년 초부터 활동을 재개하여 유시연(柳時 淵)이 인솔하는 안동의병과도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영남지역의 의병항전을 주도해 나갔 다. 신돌석은 대규모 의병부대를 몇 개의 소단위 부대로 편성, 산간벽지를 근거지로 하는 유격전을 벌여 일군 '토벌대'의 추격을 따돌리면서 이에 타격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신돌석 의병부대의 활동지역 안에서는 일제 군경이 분파소를 설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군의 정찰활동도 낮에만 겨우 가능했을 정도였다. 이에 상주의 일군수비대장 산전(山田) 소좌는 일월산 지역의 의병을 '토벌'하는 일이 급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