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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 허 위(許 蔿) 한말 일제침략이 가중되던 시기에 침략세력을 물리치고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 민족 운동자들은 각자의 주의와 주장에 따라 다양한 투쟁양태를 보여주었다. 허위는 전통적 성리 학을 학문기반으로 하였으면서도 중년에는 신학문에 대한 소양도 가지게 되었던 인물이다 . 이러한 바탕 위에 그는 초기에는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보수 유생의 입장에서 을미의병항전 에 투신한 뒤, 관직에 나아가 관료의 신분으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도 벌였고, 국망 을 눈앞에 두고서는 다시 의병항일전에 투신, 위국헌신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 결국, 그는 재야, 관변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항일투쟁에 진력하였던 것이다. 허위는 철종 4년(1855)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林隱里)에서 진사인 청추헌(聽秋軒 ) 허조(許祚)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자를 계형(季馨), 호를 왕산(旺山)이라 하였고, 김 해(金海)가 본관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그 일대에서는 이름높은 유학자 집안이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계부(季父) 해초(海樵) 허희(許禧)와 20세 위인 맏형 방산(舫山) 허훈(許薰)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특히 허훈은 조 부인 태초당(太初堂) 허임(許恁)에게 글을 배운 뒤 성재(性齋) 허전(許傳)과 계당(溪堂) 유주 목(柳疇睦)의 문하에 출입, 문명을 크게 떨쳤으며, 막내 아우인 허위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 을 끼쳤던 인물이다.1) 남달리 총명한 허위는 7세 때 벌써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때 지은 시 가운데는, 달은 대장군이 되고 별은 만병이 되어 따르도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뒷날 13도창의군을 모아 수도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자신의 모습 을 연상케 한다. 또한, 꽃을 꺾으니 손에 봄이요 물을 길으니 달빛이 문 안에 드네 라는 구절은 그의 뛰어난 시상(詩想)을 짐작케 한다.2)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의 일가는 진보(眞寶)로 피난하였다. 상주, 선산 등지는 동학세력이 특히 강성하던 지역이었으므로, 유학자 집안이었던 그의 일가는 화란을 피해 그곳으로 옮아 갔던 것이다. 이후 그의 집안은 진보에 일시 정착, 그곳의 의병항전을 주도하기도 하였다.3) 허위의 의병항전은 1896년부터 시작된다. 전년 10월에 민비가 일인 낭인들의 손에 시해 되고, 그 울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11월에는 단발령이 반포되어 민족적 자긍심이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전국 각처에서 항일의병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에 허위도 각처 의병의 봉기에 자극을 받고 서둘러 거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인 구미 임은리에 있던 허위는 지산(止山) 이기찬(李起燦), 이은찬(李殷贊), 진사 조동 호(趙東鎬), 이기하(李起夏) 등 인근의 지사들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 1896년 3월 26일 김천 장날을 기회로 김천읍에 들어가서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아 항일의 병의 기치를 들었다. 그는 이때 42살의 장년이었으며, 이기찬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자신 은 참모장이 되어 다음과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4) 대 장 : 이기찬 군문도총(軍門都摠) : 조동석 찬획(贊劃) : 강무형(姜懋馨) 참 모 장 : 허 위 서 기 : 이시좌(李時佐) 여영소(呂永昭) 중 군 : 양제안(梁濟安) 선 봉 : 윤홍채(尹鴻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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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