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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이범직(李範稷) 등의 호응을 얻어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이필희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서상 렬을 군사(軍師)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1월 22일 단양에서 공주병참 소속의 관 (官), 일(日) 혼성군과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11) 그러나, 이후 관, 일군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자 서상렬과 이춘영은 죽령을 넘어 풍기로 들어갔고, 안승우는 영동으로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인석은 전령을 보내 이들을 모두 영월로 모이게 했다 . 12) 전력의 분산을 막고자 함이었다.   영월에서 회합한 이필희 이하 이춘영, 서상렬, 안승우 등은 유인석에게 거수(去守) 발정 (發程)을 포기하고 의병장이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그는 드디어 '복수보형'(復讐保 形; 항일수구(抗日守舊)의 뜻)의 기치를 들게 되었다. 그의 족숙인 유중악(柳重岳)은 이 소 식을 듣고 고양된 의병진의 기세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간곡한 눈물이 이 노인을 일으켜 팔도에 혈서격문 날려 보냈네 일찍이 없었던 대변을 맞이하여 단충(丹衷)을 보전코자 권도(權道)로 싸우네 이름난 대장 아래 군용도 씩씩하고 하늘이 보우하사 사기도 충천하네 부끄럽다 못난 나 시골에 묻혀서 큰 공훈 힘입어 본심을 지키네13)    유인석은 의병대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14)이라는 격문을 발 표하여 사방의 의기(義氣)를 고무하는 한편, 의병진을 아래와 같이 개편, 본격적인 항전준비 를 갖추었다. 의병대장 : 유인석 중 군 장 : 이춘영      전군장 : 안승우 후 군 장 : 신지수      선봉장 : 김백선 조련장(操鍊將) : 안성해(安成海) 참 모 : 박주순(朴胄淳) 사객(司客) : 장충식(張忠植) 종사(從事) : 이조승, 홍선표(洪璇杓), 이기진(李起振), 정화용(鄭華鎔)15) 이 호좌의병진은 거의 초기에 안승우, 이필희, 이춘영 등이 모집한 지평 의병 400여명을 주 축으로 하고 화서 연원을 중심으로 한 각 지역 단위의 소규모 의병진들이 연결되어 연합부 대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의병대장에 취임한 유인석은 제천으로 회군해 곧바로 충주성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 그는 또한 친일개화파 관리로 이름높던 단양군수 권숙(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 등 소위 토왜(土倭)들을 참수, 친일개화정책을 펼치던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16) 호서의 중 앙에 위치한 충주는 관찰부가 있는 곳이고 더욱이 그곳에는 관군이 400명, 일본군이 수백 명, 지방군이 400명이나 집결해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면 호서를 장악함은 물론 뒤로 영남과 호남을 배경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틀을 확보할 수가 있 었던 것이다.   유인석 의병진은 1896년 2월 16일 의외로 쉽게 충주성을 장악하였다. 승지 우기정(禹冀 正)과 이호승(李鎬承)이 각각 3천명, 5백명의 병력을 원조해 와 군사수는 관, 일군측에 비해 우세였지만 실제 총을 가진 의병은 4백여명에 불과해, 신식 병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군에 비해 의병진이 전력면에서는 절대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의병들이 일 시에 함성을 지르며 기습공격을 감행하자, 그 기세에 눌린 관, 일군은 항전을 포기하고 탈 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충주성에 입성한 유인석은 먼저 친일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삭죄, 처단하는 한편, <격 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발표하여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했다.17) 또한 의병진의 세력 을 확장시키기 위해 서상렬, 원용정(元容正), 홍선표 등을 영남으로, 이범직(李範稷)을 호서 로 각각 소모사(召募使)로 파견, 각지의 민병을 모으게 했다. 그리하여 서상렬은 안동, 예 천, 봉화, 순흥, 풍기, 영천 등지의 의병진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상주 태봉(台峰)의 일군 병 참을 공격하였고, 이범직은 삭발을 심하게 강요해서 백성의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 숙(金炳肅)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한편, 충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성의 외곽을 포위, 의병진의 보급로를 차단시킨 채 공성작전을 펼쳤다. 그뒤 의병진은 계속되는 접전으로 전력이 소모된데다가 보급로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