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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2. 군부(軍部)를 비롯한 육군에 관계되는 기구는 전부 폐쇄시킨다. 3. 장교 중에 한국군에 남을 필요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전부 일본군에 복속시킨다. 4. 해산된 사졸(士卒)중 경찰 자격이 있는 자는 경찰관으로 채용하고 나머지는 실업에 종사 케 한다.2)   일제는 심지어 해산병들을 간도(間島)에 이주시켜 개간을 시키거나 둔전병(屯田兵)으로 황 무지 개간에 종사시키려는 구상까지도 세워 그들의 식민침략의 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일제의 한국군대 해산 계획의 구상은 물론 대한침략의 원흉인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으로부터 나왔고, 이완용(李完用)의 친일매국 내각에 의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한국군 해산 계획을 확정해 놓은 일제는 한국군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리게 하고 또 화약 , 무기고를 접수하는 한편, 만일에 있을 '폭동사태'에 대비해 본국 정부에다 목하 서울에는 6,000여명의 한국군이 있어 언제 봉기할지 모르는 일이니, 무장해제가 필요 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의 우세한 병력의 확보가 요청된다.    라고 하여 조속한 시일 안에 증원군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본국 으로부터 제12여단의 전투부대를 급파해 대구(울산, 부산, 영일), 대전(군산, 청주, 광주, 목 포), 용산(수원, 인천, 개성, 해주, 영등포), 평양(정주, 황주, 진남포) 등지에 배치시켰다. 그 리고, 그때까지 전국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13사단 병력을 서울에 집중 배치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해군까지 동원, 인천항에는 구축함 4척을 대기시키고, 한국 연해에는 제2함 대를 순항케 하였다.3)   이와 같은 일본군의 배치는 7월 30일에 완료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야밤에 일군 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를 거느리고 창덕궁으 로 들어가 미리 작성해 놓은 각본대로 암약(闇弱)한 융희황제로 하여금 강제로 군대해산 조 칙(詔勅)을 재가토록 했다. 아래에서 보듯이 그 조칙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을 은폐한 것 이었고, 그 문장도 이등(伊藤)이 작성한 것이었다.   짐(朕)이 생각건대, 국사다난한 때를 당해 용비(冗費)를 절약,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사 용함이 금일의 급무라. 현재 우리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이루어져 상하일치해서 국가의 완 전한 방위를 족히 다하지 못하는 까닭에 짐은 이제부터 군대의 쇄신을 위해 징병법을 발포 하여 정예의 군사를 구비코자 하므로 황실 시위에 필요한 일부만 남기고 모두 일시 해산케 하노라. 짐은 그 동안의 노고를 헤아려 은금(恩金)을 내리노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헤아려 각자 생업으로 돌아가라.4)   군대 해산은 8월 1일에 이루어졌다. 이날 오전 한국군의 시위혼성여단장 양성환(梁性煥 ) 이하 연대장, 대대장 및 기타 각 부대장들은 자대에 배속되어 있던 일본군 교관과 함께 현 재의 소공동에 위치해 있던 일군사령관 관저 대관정(大觀亭)으로 소집되었다. 이 자리에는 일군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와 군부고문 야진진무(野津鎭武)가 참석하였고, 군부대신 이병무가 해산조칙을 낭독하였다. 뒤이어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의 일장 '훈시'가 약 1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각 부대장들은 일본군 교관과 같이 각자 부대로 돌아가, 금일 훈련원에서 도수훈련(徒手訓鍊)이 있고 또 내외 장관(將官)들의 연설이 있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말하고 무기를 소지시키지 말고 오전 10시까지 훈련원에 집합시키라고 '명령'하였던 것이다. 그리 고 해산이 조용히 이루어지도록 도와줄 것을 당부하였다.5)   대대장과 부대장들은 그간의 일제의 동정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임석했지만, 막상 군대 해산이라는 충격적인 발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제의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오전 8시경 부대로 돌아갔다.   한편, 해산식이 열릴 훈련원에는 군부협판(軍部協辦)인 참장(參將)6) 한진창(韓鎭昌)과 일 군참모장 모전(牟田) 소장, 야진(野津) 군부고문 등이 이른 아침부터 제반 준비를 갖추고 있 었고, 그 주위에는 일군 기병, 공병, 보병으로 구성된 혼성부대가 삼엄한 경계를 펴며 한국 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대장 김기선(金基善)과 배속 일군 교관 칠미(七尾) 대위가 이끄는 기병대가 한국군 가운 데 제일 먼저 훈련원에 도착했다. 그 뒤를 이어 전동(典洞)의 시위 제1연대 제3대대, 보덕 문(普德門) 밖의 제2연대 제3대대 및 공병, 포병부대가 교관들의 독촉을 받으며 강제로 동 원되었다.   그러나 이때 서소문 안에 있던 병영과 서대문 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렸다. 강제동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