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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에서 의병항전 전후기에 걸쳐 상징적인 20여인의 열전을 기술함에 그치고 나머지는 후일을 기약할 따름이다. 끝으로 본서의 기획 간행을 담임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당 국에 감사를 드리고, 아울러 자료수집에서부터 마지막 교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력을 다 한 박민영(朴敏泳)(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과정)군에게 사의를 표한다. 1990. 3. 1 우면산하 서초서실에서 윤 병 석 1. 전기의병 유인석(柳麟錫) 구한말 일제침략과 그를 이은 식민지하 민족수난기에 항일구국항쟁의 대열에 나선 선열로서 그 기백이 장하지 않은 이가 있으리오마는 유인석은 특히 한 시대의 항일기운의 상징이 될 만큼 항일의식에 철저했고 또한 의병장이 되어 이를 시종일관 실행에 옮겼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1) 의병항전의 기간은 대체로 1894∼1914년의 20여년간에 걸치는 것으로 이해되 고 있다. 이 시기는 바로 유인석이 의병항전의 가치를 든 이후 서간도(西間島)에서 작고할 때까지의 기간과 일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거의(擧義)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항일의병 전이 개시되었고, 그의 작고를 전후하여 의병항전도 독립군으로 전환되어 새로운 항일전으 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의병항전의 상징적 인물인 것이다.   유인석(호: 의암(毅菴) 자: 여성(汝聖), 본관: 고흥(高興))은 1842년(헌종8)에 강원도 춘성 군 남면 가정리(柯亭里)에서 유중곤(柳重坤)과 고령 신(申)씨의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되던 해 원족숙(遠族叔) 유중선(柳重善)의 양자로 들어간 이후 양가의 문벌 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양가의 증조부 율리(栗里) 유영오(柳榮五)2)가 잠강(潛江)에 은거 (隱居)하고 있던 당대의 거유(巨儒)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와 일찍이 교분 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유인석은 입양되던 그해에 화서 문하에 나아갈 수 있었다. 당시 화 서 문하에는 금천(錦川) 임규직(任圭直), 단구(丹邱) 이인구(李寅龜), 괴원(槐園) 이준(李埈 ; 화서 장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등 걸출한 인물들이 운 집해 있어 그로서는 최고의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 도 그는, 훗날 화서의 정통 도맥을 이어받는 김평묵, 유중교 양인으로부터 직접 수업을 받 았다.    따라서 유인석은 일찍부터 화서학파의 핵심 사상인 위정척사(衛正斥邪), 존화양이(尊華攘 夷) 정신에 철저히 경도되어 있었다. 이 점은 그의 나이 24살 때인 고종 2년(1865)에 조선 조 유자(儒者)들의 숭명존화(崇明尊華)의 상징이었던 만동묘(萬東廟)가 대원군에 의해 철폐 되자   아, 슬프도다. 이제 양이(洋夷)가 횡자(橫恣)해 사방에서 음사(淫邪)가 점차로 이를 것이 니, 큰 의리가 한번 흐려지면 큰 제방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3) 라고 탄식하면서 이를 대변고로 인식한 사실로도 짐작할 수가 있다.    또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인양요때에는, 유림(儒林)의 대변자로서 조 정에 소환된 스승 이항로를 따라 상경, 한 달 가량 서울에 머물면서 외세와 그들로부터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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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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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