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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 47명과 함께 상경,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강력한 개항반대론을 펼 수가 있었던 것이다.5)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하고 이후 조선은 일제를 비롯한 열강 의 침략무대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그뒤 1886년 성재 유중교가 선사(先師) 화서의 심설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를 보완하 는 작업으로 심설조보론(心設調補論)을 발표하면서부터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과 이견이 생기면서 화서학파내에 심설논쟁이 일어나게 되자, 이소응은 유인석, 유중악(柳重岳), 이근 원(李根元) 등과 함께 성재의 심설을 적극 옹호하는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와중에서 중암의 사위인 홍재구(洪在龜)가 2차에 걸친 서신에서 '전복부사지전형(顚覆父師之 典型)', '일시지정욕(一時之情欲)', '반이타적(反而他適)', '진개종시(眞箇從時)' 등의 극단적인 용어를 구사하며 성재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에 이소응은 이근원, 송민영(宋敏榮), 유중악 , 김영록(金永錄), 유인석과 연명으로 1893년 3월 홍재구에게 역시 격렬한 어조로 된 글을 보내 그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제 그 일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6) 오호라, 성재 선생이 전후로 무척(誣斥)받은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이나 지금 그대(홍재 구)의 두 글에 이르러 그 극에 닿았다. (중략) 이제 그대는 도리어 차마 들을수 없고 볼 수 없는 무욕(誣辱)을 가했으니, 우리의 결단은 (그대에게) 고절(告絶)하고 의리(義理)에 처하는 것임에 무엇을 의심하리오. 단지 우리(화문(華門))의 분열이 심해져 이런 지경에 이르면 선 사(화서)의 영혼이 저승에서 슬퍼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중암, 성재 양선생의 분노에 부딪 칠 것이니 이를 두려워 하노라. 1889년 8월 유중교가 새로운 강학 장소를 찾아 충북 제천의 장담(長潭)으로 남하하자 , 이소응도 역시 유인석 등과 함께 스승을 따라 이거하였다. 그가 제천과 인연을 맺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그리고 1893년 성재 타계 때까지 더욱 독실하게 학문 수학에 열중하게 된다. 하지만, 일제침략세력은 날이 갈수록 강성해져 이 즈음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 1894년에 들어서는 조선 전래의 문물제도를 일시에 변경하는, 즉 '개정삭 역복색 변관제 혁 주군(改正朔 易服色 變官制 革州群)'하는 갑오개혁 조치를 단행한 다음 이듬해에는 을미사변 을 일으켜 민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려 민족 자존의 상징이던 상투를 잘라냈다. 이소응은 이러한 난국을 만고대변(萬古大變)으로 인식, 절대적인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 었다. 이와 같은 의식의 저변에는 화서학파 학문의 특질인 화이론적(華夷論的) 문화관에 입 각한 위정척사론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이때 지은 그의 <훼복훼형론(毁服毁形 論)>에 잘 드러나 있는데, 그 가운데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훼복(毁服; 변복(變服)), 훼형(毁形; 단발(斷髮))이 큰 죄가 됨은 어째서인가? 가로되, 화 하(華夏)와 이적(夷狄)은 제각기 정해진 복제(服制)와 형제(形制)가 있으니, 원몌(圓袂; 둥근 소매)와 계발( 髮; 상투)은 화하(華夏)의 정형(定形)이며 협몌(狹袂; 좁은 소매)와 치발 (  髮;短髮)은 이적의 정형이다. 고금에 오늘보다 훼복형(毁服形)이 심한 적이 없었으니, 선왕 이 끼치신 법도의 훼상됨이 마치 운무(雲霧)가 사라짐과 같아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게 되 었다. 오호라, 슬프도다. 무릇 우리 사람된 자는 장차 모두 죽어야만 하리라.7) 이와 같은 분위기하에서 이소응은 1896년 1월 20일 의병대장에 올라 창의복수의 깃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