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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19)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강북일기(江北日記)>, pp.127-152 참조. 20) <강북일기(江北日記)>, pp.145∼151. 21) 유인석은 이때 서간도에 망명중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도 귀국하게 된다. 22)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행상(行狀)>, p.309. 23) 박민영(朴敏泳) : <민용호(閔龍鎬)의 강릉의병항전(江陵義兵抗戰)에 대한 연구>(《한국 민족운동사 연구 5》, 지식산업사, 1991), pp.37∼81 참조. 김복한(金福漢)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경기, 충청, 강원 등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확대된 을미의병 가운데 홍주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은 충청도 의병을 대표할 만큼 그 기세가 왕성했었다. 최근 연구에 의해, 이 시기의 홍주의병을 주도한 김복한, 이설 등의 핵심인물들 이 남당(南塘) 한원진(韓元振)의 절의정신을 계승한 '당문(塘門)'임이 밝혀져 주목되고 있 다.1) 즉, 절의정신에 투철하였던 남당(南塘)의 학문과 사상이 이들에게 이어져 거의의 한 배경(背景)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복한은 철종 11년(1860) 7월 24일 홍주의 조휘곡(朝暉谷; 홍양면(洪陽面) 조향리(照香 里) 향산(香山))에서 김봉진(金鳳鎭)의 2남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원오(元五), 호 는 지산(志山)으로 안동(安東)이 본관이다. 그는 총명한 자질과 활달한 기질을 타고나 어려 서는 고령현감(高靈縣監)을 지낸 그의 조부 김정균(金正均)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 다고 한다. 그러나, 김복한은 일찍이 부모와 조부를 잃고 고아로 자라게 되었다. 즉, 그가 6, 7세 나 던 해 부모의 연상(連喪)을 당하였고 모상(母喪) 직후에는 그를 총애하던 조부마저 타계하고 말아 졸지에 고아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집안이 원래가 사족(士族)으로 인근에서 덕망을 쌓아 놓았던 까닭에 그는 성장하면서 주변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김복한은 8세 때부터 학문을 수학하였다. 즉 원족(遠族)되는 소죽(小竹) 김민근(金民根 ) 이 어린 나이에 천애고아가 된 그를 애처롭게 여겨 그의 집으로 내방, 교육을 담임하는 한 편, 가산을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2) 그뒤 김복한은 12살 때부터는 보다 널리 스승을 구해 농은(農隱) 이돈필(李敦弼)의 문하 에 나아가 수학하는 한편, 15세가 되어서는 복암(復菴) 이설과 함께 화산(花山)으로 가 학문 을 토론하였다. 그의 내종제인 이설은 이처럼 학문적으로는 동학(同學)이었던 동시에 뒷날 의병항전 때에는 그와 함께 일관해서 거사를 도모하던 동지이기도 하였다. 그는 여러 서적 가운데서도 특히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탐독하였다 한다. 김복한이 호론(湖論) 계통의 학맥과 접합되는 최초의 기사는 23세 되던 해에 그가 인근 의 덕산(德山)에 있던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1∼1767)의 묘소를 참배하였다는 기록 에서 나타난다. 윤봉구는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가운데 걸출하였던 강문8학사 (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호락논쟁(湖洛論爭) 때 최징후(崔徵厚), 한지홍(韓之洪) 등과 함 께 한원진(韓元震)의 호론(湖論)을 적극 지지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김복한이 윤봉구의 묘 소를 참배하였다는 사실은 이때 그는 이미 학문, 사상적으로 호론(湖論)에 깊이 경도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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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