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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경주도소모장(慶州都召募將) : 이채구(李采九) 참모 : 이준구(李俊久) 이종흡(李鍾翕) 장상홍(張相弘) 이우정(李寓禎) 박승교 좌선봉장 : 서두표                               우선봉장 : 홍병태(洪秉泰) 좌 익 장 : 안옥희(安玉熙)                     우 익 장 : 안재학(安載學) 중 군 장 : 이익화(李益和)                     후 군 장 : 김두병(金斗炳) 좌 선 봉 : 이용관(李容觀)                     우 선 봉 : 이상태(李相台) 좌포장(左砲將) : 황성학(黃性學) 우 포 장 : 이시민(李時敏) 영솔장(領率將) : 김병문   한편, 의병들의 공성 계획을 알아차린 성 안의 관군들은 동문과 북문에 며칠전부터 매복 한 채 의병들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하락은 조성학을 공성선봉(攻城先鋒)으로 삼아 정병을 이끌고 동문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성 안에 있던 관군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김하락은   너희들도 역시 동족인데, 어찌 복수하려는 우리 의병에 항거하느냐. 이것은 역적을 돕는 대죄이다. 끝내 회개치 않으면 옥석(玉石)이 같이 불타버릴 것이다. 빨리 성문을 열어 후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17) 고 성 안의 관군들을 의리로서 꾸짖고, 의병들을 독려, 맹공을 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 부 포군들이 성을 넘어 들어가 성문을 열었다. 이에 미쳐 의병들이 물밀 듯이 들어가자, 군 수 이현주(李玄澍)와 중군 윤흥순(尹興淳) 등은 급히 달아나고, 성은 드디어 의병들의 수중 에 들어오게 되었다.    경주를 점령한 김하락 의병은 즉시 방문(榜文)을 붙여 주민들을 위무하는 한편, 수성(守 城)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동문에 이용관(李容觀)·최진엽(崔鎭曄), 동소문(東小門)에 이병원(李炳遠), 남문에 황성학(黃性學)·오학문(吳學文), 서문에 이시민·박수한(朴壽漢), 북문 에 김학문(金學文)·노성호(盧性浩) 등을 각각 배치하여 파수를 담임시켰다. 그리고 인근의 동화(東華), 기계(杞溪), 죽장(竹長) 등지에 소모관을 파견, 널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에 김하락 의병은 그 성세를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다수의 관군들이 경주성을 향해 진격해 왔다. 즉 의병들이 경주성을 점 령한 지 엿새 뒤인 6월 20일에 관군은 두 길로 나뉘어 의병을 공격하기 위해 성으로 접근 해 온 것이다. 의병들은 이들을 맞아 이틀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시간이 흐를수 록 점차 전황은 불리해졌다. 특히 의병들은 격전을 치른 결과 탄약이 고갈되어 치명적인 타 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성을 지탱할 수가 없게 된 김하락 의병은 6월 13일 새벽에 야음을 틈타 동문으로 빠져나가 기계(杞溪) 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 경주성 공방전에서 김하락 의병은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고, 이후 그의 의병항전은 점차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던 것이다.    경주성을 탈출한 김하락은 잔여의병을 거느리고 흥해로 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는 북상길에 올라 청하, 영덕을 지나 7월 8일 영해에 이르러 유진하였다. 이 무렵에 영덕의 신돌석(申乭石), 안동의 유시연(柳時淵) 등의 청년 의병장들이 가세해 와, 다소 세력을 만회 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는 영덕에서 최후의 일전을 펼치게 되었다. 즉 7월 12일 3백여 명의 관군이 흥 해를 거쳐 영덕으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자, 김하락은 의병들을 이끌고 다시 영덕으로 내려가 이들과 조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튿날 김하락은 의병들을 독려, 기세등등하던 관 군들을 물리치고 일차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러나, 폭우가 쏟아지던 다음날 오후 동 래로부터 증원군이 도착되자 관군들은 전의를 회복, 일시에 의병진을 향해 맹공을 개시해 왔다. 여기에 당황한 의병들은 사방으로 패주하게 되었고, 김하락도 양쪽 어깨에 총상을 입 는 중상을 당하였다. 그러자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울부짖고는 폭우로 불어난 강물 속으로 투신, 41살의 나이로 최후를 마쳤다.18)    우리 오백년 예의의 나라가 견양(犬羊)같은 도이(島夷)에게 돌아가니, 아, 우리 민족은 과연 이 참화를 면치 못할 것인가. 내가 차라리 어복(魚腹)에 장사(葬事)할지라도 도적놈들 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주위의 군졸도 그의 뒤를 따라 강물속으로 투신하였다. 마침 영덕 강하구(江河口)에 살던 손치원(孫致元)이 강물에 떠내려가던 그의 시체를 건져 해안에 매장해 놓아 시신이 망실되 는 것은 막았다. 그뒤 1914년 일제치하에서 그의 후손들은 은밀히 충남 서천군 남산으로 반장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