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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대장 박준영(朴準英)   여주대장(驪州大將) 심상희   군사겸도지휘(軍師兼都指揮) 김하락   도소모(都召募) 전귀석 선봉장 김태원 중군장 구연영 좌익장 김귀성 후군장 신용희 우익장 김경성 이다.     이렇게 조직된 의병진은 수일 동안 훈련을 실시한 다음 2월 말경에 장안을 굽어볼 수 있 는 요새지인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    남한산성은 임진왜란 동안인 1595년 축조된 둘레 약 8km의 석성(石城)으로서, 병자호란 때 인조가 45일 동안이나 이곳에서 청군과 대치한 고전장(古戰場)이며, 그후에도 서울 외곽 의 가장 중요한 요새지로 인식되어 부단히 성곽을 보수하고, 5군의 하나인 수어청(守禦廳 ) 을 두어 수도의 외곽방비를 전담시켰던 곳이다. 그리고, 이 산성에는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승병지휘관을 두어 유사시 산성방어임무를 맡도록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는 평소에 많 은 무기와 군량이 비축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점령한 의병은 당시 최대의 난제이던 군수물 자 조달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형 또한 활동거점으로 삼기에 유리한 곳이었 다.5) 그러므로 김하락은 남한산성을 점령한 직후 그 감회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던 것이 다.   이 산성은 사면이 깎아세운 산악으로 성첩이 견고하여 참으로 '일부당관 만부막개(一夫當 關 萬夫莫開)'의 요새이다. 성안을 두루 살펴보니, 군량미가 산처럼 쌓여 있고 소금이 수백 석이 있으며 군수물자가 풍족히 비축되어 있었다. 대완구(大碗口), 불랑기(佛狼機), 천자포 (天字砲), 황자포(黃字砲), 지자포(地字砲) 등이 각기 수십 문이 있었다. 천보총(千步銃)도 수백 정이 있었고, 그 나머지 조총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화약 탄환 또한 산더 미같아 여러 장수들이 군수물자가 넉넉함을 기뻐하였고, 또 성곽이 견고함을 좋아하였다.6 )   남한산성을 점령한 뒤 의병진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서를 정해 수성(守城)에 만전을 기하 였다. 남문 : 김태원(선봉장)       북문 : 신용희(후군장) 서문 : 김경성(우익장)       동문 : 김귀성(좌익장) 중앙 : 구연영(중군장)   한편, 의병진이 남한산성을 점령하게 되자, 서울의 친위대와 강화진위대 군사로 구성된 1 개 혼성대대 병력이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7)의 지휘 아래 산성을 포위하고 의병진을 공 격해 왔다. 그들은 남문 밖 매착동(梅着洞)에다 지휘소를 설치 1개 중대를 배치시킨 뒤 불 당곡(동문 밖)과 향교리(鄕校里; 북문 밖)에다 1개 중대씩, 석회당(石會當; 서문 밖)과 엄현 리(奄峴里; 동문 밖)에 일개 소대씩을 각기 배치해 놓고 산성과 통하는 교통로를 차단하며 집요한 공성작전(攻城作戰)을 펼쳤다.8)    이때 김하락은 관군과 대치하는 서글픈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 동족상쟁의 역사적 비 극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 관군들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그러나, 왜적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병정이므로 ,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가슴 아픈 일이다. 성 안의 의병과 성 밖에 유진한 관군은 연일 크고 작은 전투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매전투 마다 항상 견고한 성벽을 의지해 지형적 우세를 점한 의병측에 유리하게 전황이 돌아갔다 . 관군은 기습전을 펴기도 하고 화공(火攻)을 계획하기도 하는 등 온갖 공성작전을 다하였으 나, 그때마다 의병측의 반격으로 번번히 격퇴당해 성에 근접할 기회조차 얻을 수가 없었다 . 오히려 의병들이 성을 나가 관군을 공격하면서 교란전을 펴던 실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