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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 - 군헌병대와 격전을 벌여 이들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2. 8월 11일 : 오전 6시경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구례의 경무분파소를 습격하여 일제 군경을 격퇴시킨 뒤 무기를 노획하였다. 3. 8월 17일 : 오전 8시경 약 8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함양군 좌전(左田)에서 일제 군경 20여 명과 조우, 접전을 벌인 끝에 이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4. 9월 4일 : 휘하 의병 6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의 월성(月城)에서 일제 군경 40여 명과 교 전, 이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다. 5. 9월 15일 :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전북 용담(龍潭) 심원산(深源山)에서 일제 군경 47명과 조우, 종일토록 격전을 벌여 이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6. 1908년 2월 :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용담 구랑(九郞) 일대에서 일제 군경과 교전을 벌여 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7. 1908년 2월 : 오전 6시경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전북 무주군 황천면(黃川面) 삼곡리(三 谷里)에서 일제 군경과 교전을 벌여 피해를 입혔다. 8. 3월 6일 : 8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거창군 매학(梅鶴) 일대에서 일제 군경 7 0 여 명과 교전을 벌여 이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처럼 영, 호남 각지에서 김동신 의병부대의 활발한 항전이 계속되자 일제는 진해만에 있던 중포병대(重砲兵隊) 1개 소대까지 동원하는 등 의병진압에 혈안이 되었다. 김동신 의 병의 활동상과 이를 진압하기 위한 일제 군경의 투입상황에 대해 일제측은 다음과 같이 기 록하고 있다. <김동신 의병 주요 이동로> 1907년 8월부터 12월에 이르는 동안에 창궐이 극하였던 김동신이 인솔한 무리가 그 수에 있어서 가장 많아 각지를 황행하여 흉포함이 이르지 않는데가 없었다. 그러므로 진해만 중 포병대(重砲兵隊) 소위는 하사 이하 20명을 거느리고 진주경찰서 순사 3명, 순검 6명과 함 께 하동군 화개상면(花介上面) 탑촌(塔村)에 집합한 김동신 의병을 공격할 목적으로 10월 17일 새벽 그곳에 도착하여 격전 분투한 지 한 시간만에 부장 고광순(高光洵) 이하 25명을 죽이고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11) 일제군경들은 그뒤 10월 24일 김동신 의병의 근거지 가운데 하나로 지리산의 문수암(文 殊菴)을 지목, 암자를 소각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1908년 2월에는 남원, 광주, 구례 , 진주, 하동 등지의 일군수비대 병력을 동원, 김동신 의병의 진압에 투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