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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로 파견하여 한국의 완전독립을 요구케하였고 이해 3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조국광복의 역사적 임무수행을 하시고 5월에는 친제 여운홍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한국대표단과 함께 조국독립획득을 위한 최대한의 활동을 전개케 하셨다. 이해 12월에 일본정부 초청으로 동경에 가셨으며 동경제국호텔에서 한국독립을 주장한 연설로 인해 일본 조야에 비상한 물의를 일으켰음은 물론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동경대학 吉野作造 교수가 박도하는 신인연설에서 吉野作造 교수의 선창으로 한국독립만세를 불러 큰 파문을 던졌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피압박민족 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5인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시었으며 레-닌 트로쯔기 등과 회견하고 이 대회에서 연설을 통해 한국독립운동의 원조와 지대를 호소하셨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선생은 상해에서 한중호조사를 조직 한국의 독립과 중국혁명의 성공을 위해 한중이 유기적 유대를 맺고 광동정부의 손문과 한국의 독립과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해방문제에 대해 직격하게 토의를 하시고 노병회를 조직하셨다. 1924년 선생은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시고 한중간의 상호협력을 위해서 국민혁명군을 돕기위한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셨다. 1929년 상해복조대학 축구팀을 인솔하고 동남아 각지를 순회하시면서 미영 등의 식민정책을 성토하는 강연을 하셨다. 동년 상해공설운동장에서 일본결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 193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1932년 초선체육회장에 취임하셨다. 1936년 베르린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중앙일보가 폐간되어 사장직을 물러나셨다. 1939년부터 일본 동경에 단유하시면서 세계정세를 살피시며 한국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해방될 조국의 인재양성을 위해 활동을 하시다 1942년 12월 귀국 도중 일본헌병대에게 체포되어 재차 투옥당하시고 1944년 7월에 출옥하셨다. 출옥을 하시자 이해 8월에는 건국동맹 농민동맹등 지하조직을 하고 가까워오는 해방에 대비하셨다. 1945년 선생이 60세시 8.15민족해방을 맞이하여 민족통일국가건설을 위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시고 위원장에 취임하셨으며 10월에는 인민당을 조직하시고 당수에 취임하셨다.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1946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장단에 추대되셨다. 그리고 노동인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