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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곳 백악산 기슭에 고이 잠드신 어른은 곧 조국의 광복과 독재의 타도에 일생을 바친 대유학자요, 노혁명가이신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金昌淑 先生)이시다. 조국은 찾았으되 국토는 반쪽이요, 독재는 무렸으나 신정(新政)은 마련되지 못한 1962년 5월 10일 선생은 홀연히 나라와 후배를 버리시니 정계엔 원로를 잃었으며 유가는 스승을 여의어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기었다. 선생의 일명은 우(遇)요 자는 문좌(文佐)요, 직강(直岡)과 벽옹(躄翁)의 아호가 있으나 심산(心山)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선생은 일찍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선생의 십삼세사손(十三世祀孫)으로 1879년 7월 10일 성주(星州) 칠봉동(七峰洞)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 절인하고 기개가 비상하였었다. 십팔 세에 아버지 호림공(頀林公)을 여의고 어머니 장씨(張氏)의 교훈을 받아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 등 석학에게 배워 문학과 도의가 일국에 들렸으므로 이유인(李裕寅)이 출사(出仕)를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을사협약(乙巳脅約)이 이룩되자 청참오적소(請斬五賊訴)를 올렸으며 1909년엔 중추원(中樞院)에 글을 보내 한일합병(韓日合倂)을 배격하였다가 왜경(倭警)에게 구금되었고, 1910년엔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웠다. 기미(己未) 삼일(三一)운동이 일자 유림원(儒林院)을 조직하여 장서(長書)를 품고 빠리평화회의(平和會義)에 던지려 상해에 이르러 영문으로 번역하여 보내고, 그 뒤 중국의 손문(孫文) 장병린(章炳麟) 오산(吳山) 등과 회담하고 임복성(林福成)에게 공학(孔學)의 퇴폐를 규탄하였으며, 다음에 임(林)과 함께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고 이승만 대통령(李承晩 大統領) 파면에 찬성한 뒤 북경에서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천고(天鼓)를 발간하였다. 1922년 임정개조론(臨政改造論)이 대두되어 국민의회대의원(國民議會代議員)에 당선되었으나 분열을 우려하여 응하지 않고 동포의 이식(移植)을 꾀하여 빙옥상(憑玉祥)에게 수달(綏達?)의 황지 개간을 약속하고 모금차로 귀국하였다가 1926년 다시 상해에 가서 나석주(羅錫疇)를 일으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하고 의정원(議政院)을 개편하여 부의장(副議長)이 되었다. 공제병원(公濟病院)에 들어 병을 다스리다가 왜경(倭警)에게 체포되어 장산기(長山奇)를 거쳐 대구에서 매여 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앉은뱅이가 되었고, 1928년에 예심이 끝났으나 변호를 거부하여 십사(十四)년의 형을 받아 대전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다음 해에 출옥되었으나 곧 대구에 재수감되자 대전으로 이관되어 옥중에서 자서종요(字書綜要)를 엮고 경학을 연구하여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오묘를 더듬었다. 1933년 전옥(典獄)이 최남선(崔南善)의 일선융화론(日鮮融化論)을 뵈며 느낌을 쓰라고 강요했으나 거부하였고 다음 해에 출옥하였다. 1940년 일제(日帝)는 창씨(創氏) 문제로 몹시 괴롭혔으나 일축하였고 1945년 8월에 건국동맹 남조선 책임자임이 발각되매 왜관서에 수감되었다가 십오일(十五日)에 해방과 함께 출감되어 고리(故里)에 이르자 곧 군민을 모아서 임시치안유지회(臨時治安維持會)를 조직(組織)하고 서울로 떠났었다. 민중당(民衆黨)에서 당수(黨首)로 추대했으나 응하지 않고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을 해체하되 좌우익을 물론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기빨 아래로 대동단결을 외쳤으며, 송진우(宋鎭禹)에게 한민당(韓民黨) 내의 친일분자 숙청을 권고하는 한편, 이승엽(李昇燁) 이관술(李觀述)에게 공산당(共産黨)의 찬탁(贊託)을 즐책(질책, 叱責)하였다. 이들은 모두 선생의 벽옹칠십삼년회상기(躄翁七十三年回想記) 중에 상세히 실려 있다. 뒤를 이어 임시정부 국무위원(臨時政府 國務委員), 비상국민회 최고지도자(非常國民會 最高指導者) 민주의원 의원(民主議院 議員) 등에 당선되었고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儒道會 總本部 委員長) 성균관 관장(成均館 館長),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財團法人 成均館 理事長) 성균관대 학장(成均館大 學長) 등을 겸하여 유학(儒學)의 발전에 전력하였다. 1951년엔 이승만(李承晩)에게 하야(下野)를 경고하여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또 국제구락부(國際俱樂部) 사건의 주모자로 40여 일의 옥고를 겪었으며 1953년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