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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 이미 같은 것이어늘 도속이 어찌 다를 것이랴. 도를 닦을수록 속을 걱정하고 속에서 자눕되 도를 떠난 적 없었으며 살아서 진작 죽음을 뛰어났고 죽음을 또한 삶과 같이 즐기는 이가 여기 영원한 삼매 속에 누워계시니 그는 도속이 아울러 스승으로 받들던 범산 김범린 공이시다. 일찍 영천 신녕 가난한 농가에 태어나 14세에 혼허선사의 손에 출가하여 범어사와 중앙학림에서 불범을 닦으면서도 나라 없는 설움에 젊은 가슴을 태우더니 마침내 1919년 3월에 산을 버리고 거리로 뛰쳐나와 불교철학과를 마치니 이는 학문연구의 마지막 학창이요 이듬해에 브륫셀에서 열리는 세계 약소민족대회에 우리 민족대표로 참석하니 이는 광복을 위한 정치할동의 첫걸름이었다. 30세에 고국으로 돌아와 혹은 교단에서 부르짖고 혹은 신문잡지에 붓을 잡으니 이는 원효의 재능을 따름이요 또 한편 만당을 조직하여 불교혁신운동을 선구하고 다시 한편 한글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일제의 악형아래서도 민족의 얼과 말을 지켜 굴복하지 않았으니 이는 사명의 기개를 이음이었다. 47세에 해방을 만나자 불교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하여 불교중흥에 새 기둥이 되었고 민주의원을 비롯하여 효시위원장 문교부장관 국회의원 원자력원장등을 역임하여 건국의 기초를 닦음에 큰 힘을 기울인재 밖에 나거서는 유엔총회 유네스코총회 국제원자력회의 등에 참석하여 조국의 이름을 떨쳤었다. 그리다 마지막에는 일찌기 재단 확립과 대학교 승격에 몸소 애썼던 모교 동국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어 총장에 취임하매 모두들 길손이 고향에 돌아옴 같다 하더니 문득 밤사이에 적멸 속으로 들어가고 다만 남은 사람들이 그의 세상 인연 66년을 헤아리면서 대학의 이름으로 우이동에 장례 지낼 적에 나는 노래 삼장을 지어 그의 상여 위에 얹어보냈다. 불제자 큰 서원을 가슴 깊이 세우신 님 학덕을 갖추시고 바른길 예셨도다. 어질고 자비한 성품 그래 둥그시더니 정의의 금강조로 일제와 싸우셨고 부드러운 웃음 속에 오히려 매찬 지절 한평생 우국지성 이몸에 배시었더니 달같이 환하온 님 산 넘어 기울어도 벗들의 마음 강 위에 인치신 뜻과 모습 갈수록 또렷하외다 길이 비치오리다 이은상은 글을 짓고 최중길은 글씨를 쓰고 동국대학교에서 삼가 이 비를 세우다. 1966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