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page


136page

1902년 미주개발회사에서 모집하는 이민에 들어서 하와이로 건너가 1년간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유학을 하려다가 안창호를 만나 그의 권고로 이를 단념하고 안창호 정재관 등과 함께 교민단체로서 1904년에 공립협회를 창설했으며, 1905년 11월에 동지들과 함께 기관지인 『공립신문』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07년초에는 안창호와 신민회를 창립하기로 하고 안창호를 먼저 귀국시킨 후 뒤이어 이강도 귀국하여 양기탁을 중심으로 국내 동지들과 함께 1907년 4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이 강은 몇 달 후에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신민회 블라디보스톡 지회를 설치하였다. 1909년 2월에 신민회의 합법적 외곽단체로서 미주에서 종래의 공립협회를 확대개편하여 재미주 대한인국민회가 조직되자 정재관 등과 함께 이에 보조를 맞추어 재로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여 각 지방과 지회를 설치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또한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지들과 함께 『해조신문』을 창간하여 편집 논설기자로 활동했으며, 이 신문이 『대동공보』로 이름을 고친 후에도 그 편집책임을 맡았다. 1909년 10월 이등박문 처단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이에 참석하였으며, 안중근이 이등박문 포살의 특공대로 하얼빈에 나갔을 때 안중근과 대동공보사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안중근의 의거가 성공한 후에는 안중근 의사를 위한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하여 북경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대동공보』가 일본영사관의 압력으로 정간 당하자 시베리아의 치타로 가서 다시 『정교보』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9년 9월에 노령에서 파견한 강우규 의사가 일제총독 재등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나자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에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약 50일간 구금되었다. 1919년 말에 석방되자 바로 상해로 탈출하여 안창호를 만나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부의장과 의장을 역임했으며 흥사단 운동에 진력하여 흥사단 원동지방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일제의 세력이 장강 일대에까지 뻗치게 되자 상해를 떠나 남중국 방면으로 갔다. 1928년에 하문에서 강연을 하다가 일제경찰에 납치되어 평양으로 호송되었으며 징역 3년형의 언도를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자 다시 고국을 탈출하여 중국 복건성으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대만에 있는 한국 동포들에 대한 선무단 단장이 되어 대만으로 갔다가 1946년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