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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웃는 얼굴 밝은 미소, 신뢰 받는 독립기념관 여 의용군을 모집, 마적 소탕에 적극 나서게 되 었다. 김경천은 수청지역 창 해 청 년 단(滄 海 靑 年 團 ) 총 사 령 관으로 활동하면서 마적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다. 결국 1920년 수청지역에서의 마적 소탕활동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명성을 크게 얻어‘김장군(金將軍)'으로 널리 알려지 게 되었다. 1921년 봄 김경천은 수청 인근의 올가에서 조직된 통합 빨치산부대의 책임자가 되어 러시 아 백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고, 다우지미 의 수 청 고 려 의 병 대 사 령 관으로 러시아 백군과 싸우며 마적 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1년 말 이만으로 이동한 수청고려의병대는 다음해 1월 김경천의 지휘아래 러시아 적군과 함께 백 군의 근거지였던 이만을 점령하였다. 연승을 거 둔 김경천은 1922년 7월 연해주 혁명군사위원 회로부터 뽀시에트 군사구역 조선 빨치산 사령 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러 시아와 중국 국경지방 무장단체들로 조직된 고 려 혁 명 군 동 부 사 령 관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2년 말 일본군이 철수한 뒤 러시 아 적군이 동맹군이었던 한국독립군에 대해 무 장해제를 요구하자 김경천은 1923년 2월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창조파 일원으로 활 약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에 실망하고 블 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와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또한 김경천은 1924년 3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고 본부 를 블라디보스톡에, 그리고 지부를 니콜리스크 에 두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도 러시아당국의 한인정책과 노령 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점점 쇠퇴하고 말았 다. 1926년에는 윤해(尹海)・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민족당주비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 후 김경천은 1930년대 전반기까지 주로 블 라디보스톡에서 한족군인구락부 조직을 통해 산산이 흩어진 항일역량을 다시 규합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만년에는 블라디보스톡 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 어를 가르쳤다. 김경천은 1937년 한인들의 중 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앞두고‘간첩죄'로 체포 되어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1942년 1월 소련 의 북동쪽 꼬미자치소비에트공화국의 유배지에 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천은 스탈린 사후인 1959년 2월 19일 복권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김경천 관련 보도기사(동아일보 1922.1.24 1면) ▲ 연해주 한인 빨치산부대 간부(1922) ▶ 고려혁명군 관계서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