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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얼굴 밝은 미소, 신뢰 받는 독립기념관 11 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현상금 5만 엔을 내걸고 이들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만주로 망명한 김경천은 신의주 맞은편 안동 현(安東縣)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 한 독 립 청 년 단(大 韓 獨 立 靑 年 團)에 가입하여 활동 하였다. 1919년 8월 대한독립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대한독립청년단 총재 안병찬(安秉瓚) 외 28명의 연서로‘중화민국 관상보(官商報) 학계 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하였 는데 이 성명에서 김경천은 한중연합을 강조하 는 한편 우리민족의 요구가 국제연맹 회의에서 원만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면 혈전을 도모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한중공수동맹을 주 장하였다. 그러나 대한독립청년단 총재 안병찬 이 체포되자 대한독립청년단의 활동도 크게 위 축되고 말았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柳 河縣)에 있는 신 흥 무 관 학 교(新 興 武 官 學 校)를 찾아가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김경천은 신흥무 관학교에서 이청천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하며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는 구 한국군관학교 출신인 신팔균(申八均)도 교관으 로 활동하였으며, 이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 투 쟁을 맹세하고 다같이‘천(天)' 자(字)가 붙은 별호를 지었는데‘ 경 천(擎 天 ) 김 광 서(金 光 瑞)・ 청 천(靑 天 ) 지 석 규(池 錫 奎 ;이 청 천)・ 동 천(東 天 ) 신 팔 균(申 八 均 ) ' 으로, 이들은‘ 남 만 주 3천'으로 불렸으며 만주지역 항일독립운 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장길상(張吉相)이 배천택(裵天澤)을 통 해 거금 5만원을 군자금으로 보내와 계획을 추 진하였다.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그들은 국 경지대인 자성・후창・혜산진 중에서 한곳을 점령하여 국내에서 3・1운동을 다시 일으키고 자 하였다. 그리하여 신팔균은 남만주 한인사회 의 지원을, 이청천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을, 김경천은 노령지역으로 무기구입을 위 해 각각 이동하였다. 노령지역으로 이동하던 김경천은 중간 기착 지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북간도를 택하고 단신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하였으 나, 정착하지 못하고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 톡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그곳도 일본군의 시 베리아 출병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 인 체포로 인하여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 속으로 일단 피신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 청지역도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에 곤궁에 처해있는 재러 동포들을 구하기 위하 ◀ 김경천 ▲ 신흥무관학교 분교 소재지(중국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