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page

10 웃는 얼굴 밝은 미소, 신뢰 받는 독립기념관 이・달・의・독・립・운・동・가 NDEPENDENCE I 이 동 언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독립군 지도자 김경천 장군 김경천(金擎天, 1888. 6. 5~1942. 1. 2)은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 이다. 1888년 6월 5일 서울에서 부친 김정우 (金鼎禹)와 어머니 윤옥련(尹玉蓮) 사이에서 5 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서울 사직동 166번지이고, 어릴적 이름은‘현충(顯 忠)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본명은‘광서(光 瑞)'이고,‘경천(警天, 敬天), 응천(應天)'으로 도 불리웠다. 김경천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한 무관 집안이었다. 부친 김정우는 일본에 유학한 군기(軍器)전문가로 구한국 육군 최고위층 인 사였다. 김경천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고자 하였고, 어려서부터 나폴레옹을 흠모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09년 12월 유일한 한국인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3기생으로 입학하여 1911 년에 졸업하였다. 김경천은 1909년 일본으로 유학가기 1주일 전날 유정화와 결혼하였는데 유정화는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유계준(柳桂 俊)의 딸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김경천은 일본 으로 떠나기 전 그의 부인에게 피아노를 사주 고,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김경천은 부 인을 일본으로 불러 일본 육군사관학교가 있는 천엽현(千葉縣)에서 그의 두딸 지리(知利)와 지혜(知慧)를 낳았다. 김경천은 부인과의 사이 에 2남 4녀를 두었다. 김경천은 일본 육군사관 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 제1사단 기병 제1연대 에서 근무하였다. 1916년 12월 일본 육사 제 26, 27기생 가운데 홍사익(洪思翊), 이응준(李 應俊) 등 동경 제1사단에 근무하던 한국인 장교 들이 중심이 되어‘전의회(全誼會)'라는 친목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김경천이 회장으로 추대 되었다. 김경천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19년 동경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독 립선언이 있자, 이를 계기로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김경천은 병을 칭하여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는데 육사 3 년 후배인 이청천과 이응준도 귀국하였다. 이들 은 사직동 김경천의 집에 모여 상의한 결과 국 외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 였다.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김경천은 일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낮에는 당구를 치고 밤에는 술집을 드나들며 일본 헌병대의 눈을 속이기도 하였다. 그는 마침내 1919년 6월 6일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김경천과 이청천의 만주로의 망명은 3・1운 동 이후 수많은 한인청년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국외로 망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군 현역 장교의 망명은 일본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