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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4일 목요일 12 제6099호 슬픔에 싸인 유족들 ■ 유가족들의 증언 룕빨갱이 가족으로 몰렸어 징한 시상이었지 징한~룖 한국정쟁을 전후로 자행된 수많은 민간인 학살 과 은폐, 침묵과 망각의 반세기가 지난 현실에서 갈매기섬은 또 하나의 비극을 드러냈다. 갈매기섬의 전설이 현실로 드러남과 동시에 떠도는 영혼들의 진혼제가 서둘러 치러지고 유가족결성회 를 조직한 후, 유가족들은 한 명 두 명 입을 열기시작했다. 묻혀 있던 갈매기섬의 전설이 일시에 깨어난 셈이었다.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억울한 세월을 살면서 입을 다 물고 숨죽이며 살았던 사람들이 룏이제는 말하련다.룑하면 서 이구동성으로 쏟아 놓은 사연들은 들으면서, 지금도 분 단이라는 악조건 속에 근근이 살고 있는 이웃이 많다는 걸 생각하며 애써 슬픔을 참고 그들의 사연을 들어야 했다. 한국전쟁이 남긴 민간인 학살의 현장에는 마을마다 제 삿날이 한날 한시인 경우가 많은 터, 대부분 같은 날에 제 를 올리는 기구한 사연들이다. 해남유족 임순진씨는 룕징한 시상이었제. 징했어. 지금사 말해서 멋 허겄소만.룖하고 입을 열었다. 룕여기와서 보니 억장이 무너지고 그간 잊고 살면서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원한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은께.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해서 명치끝이 노상 아렸은께요. 진짜로, 진 짜로 여기까정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무차별하게 죽였을 까요? 믿어지지 않는단 말이요.룖 오희록씨의 증언이었다. 룕그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하면 무조건 좋은 것인 줄 알고가입했지요. 교육 받으러 오라고 해서 가셨는데 그 길로 끝이었습니다. 아버지 얼굴도 생각나지 않습니다.룖 박미숙씨는 룕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셨던 이야기 그대로 예요. 이 섬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오실 때의어머니 심정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심정이 얼마나 팍팍하셨을 까요? 어머니는 섬에 도착해 보니 시체가 사방으로 무더기 로 쌓여 섬 전체가 하얗게 보이더래요. 그 많은 시체 중에 서 아버지의 시체를 한 눈에 알아봤다고 하셨어요. 웃옷에 서 도민증을 발견하고 틀림없는 아버지라고 확신이 들었 는데도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갈매기섬 에서 이내 시신을 찾아 온 유일한 분이 우리 어머니셨어요. 어머니는 그때 조상님이 도왔다고 하며 새색시 적에 남편 과 사별했기 때문이지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셨어요.룖 라고 말했다. 박동일씨는 룕그 당시 끌려갔던 사람들은 평범한 백성이 었습니다. 전쟁 포로도 아니었고 이데올로기로 싸운 사람 들도 아닙니다. 보도연맹원이라는 이름하에 무조건 끌려 갔으니까요. 나중에 가족들에겐 좌익가족이라고 낙인 찍 어놓고…. 보이지 않는 피해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룖 오국서씨의 증언, 룕주위에서 빨갱이 가족라고 하니까 무 조건 빨갱이인줄 알고 겁이 나서 숨어 지 낸 세월 이 너무 깁니다. 그러니 살길도 막막했고 공부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오직 굶고, 죽지만 않고 살겠 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룖 1 , 당시 희생된 사망자 수는 얼마였으며 유해의 인류학적 특징(나이굛성별굛키굛기타)은 어떠한가. 발굴 결과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뼈대들이 대부분이며 식별 이 가능한 뼈대는 머리뼈, 빗장뼈, 주걱뼈, 위팔뼈, 엉덩이뼈, 허벅지뼈, 정강이뼈, 종아리뼈 등 총 463점이다. 이 가운데 왼쪽 허벅지 뼈를 기준으로 가늠할 수 있는 개 체 수는 2 0 구이다. 출토된 유해는 20 ~30대의 남성으로 키는 대부분 160 ~170cm로 추정했다. 2 , 집단으로 매장되었다면 어떻게 희생되었는가. 유해 매장 상태는 능선 사면 지표에 매장되어있지 않고 서 로 뒤엉켜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손을 묶고 굴비처럼 엮어진 채 희생된 것으로 보여진다. 3 , 유해는 어떤 상태로 남아 있는가. 확인된 유해는 대부분이 사지뼈로 완전한 유해는 찾을 수 없었고 흩어진 채로 나타났다. 또한 능선 중간 부분에 불에 탄 뼈가 조각 상태로 밀집되어 분포하며 열에 의해 파손된 상태로 부위 판별이나 개체 확인이 불가능하다. 4 , 유해의 사망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증거들은 무엇인가. 유해 매장지에서 출토된 유해에서 탄흔이 발견되지 않았 지만 발굴지역에서 유해와 함께 카빈탄피, M1탄피, 45구경 탄피와 탄두 등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유해가 확인 사살에 의해 사망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희생자는 먼저 기관총으 로 사살되었다는 증언이 있었으며 확인 사살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5 , 조사 성과. 갈매기섬은 현재 접근하기 쉽지 않은 무인도로 1950년 7 월 중순경 어떤 경로로 희생자들이 이섬의 발굴지역까지 도 달했는지는 의문이다. 발굴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조사한 결과 서쪽 사면 은 절벽으로, 현 발굴지역에 접근하기 힘들며 여름에는 남서 풍이 부는 관계로 남쪽 해안은 파도로 인해 접근이 어렵다는 증언이다. 따라서 희생자들이 사망한 지점으로 생각되는 발 굴지역은 북서면 해안에서 현재 발굴단이 이용하는 길로 현 장에 도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 유품으로는 M1 탄피 15개, 카빈 탄피 22개, 45구경 탄피 3개, M1 탄피두 1개 카빈 탄두1개 등과 미상의 신발류 (고무신, 구두)와 고무줄 혁대, 혁대바클, 거울, 단추 및 안경 알 4 개 등이 출토되었다. 갈매기섬은 학살 당시에는 민둥산이었는데 1960년대 이 후 사람의 발길이 없는 무인도로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구지 뽕 나무 덩굴나무, 잡목 등이 우거져 사람의 이동과 대상지 의 접근이 용이하지 못하며, 특히 발굴 대상지 일대는 60도 정도로 경사가 진 곳이다. 발굴 작업을 위해 조사단은 먼저 수목제거 작업을 실시했 었다.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면 식별이 가능한 유해 부위는 나무뿌리가 감싸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학살 후 여러 증언대로 경찰은 갈매기섬으로 다시 와서 불을 질렀음 이 분명했다. 그것은 불에 탄 유해가 상 당 수 흩어져 있는 것 으로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출토된 여러 유품으로 보아 희생자들은 비교적 사회적 지 위가 있는 사람들로 선별된 것으로 보였다. 소설가굛향토사학가 유해 발굴지에서 출토된 M1 탄피굛카빈 탄피(위)와 희생자 들의 유품들. 유해 서로 뒤엉켜 분포 굴비처럼 엮인채 몰살 혁대 굛 신발류굛 안 경 등 나 와 희생자 대부분 사회 지위층 2005년 정부는 과거사 정리법을 제정하여 과거 사를 정리하고 국가 정체성과 인권의 확립이라는 목표 아래 유해발굴에 관한 법적 토대를 마련하였 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에 관해 국가 가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유해 발굴 사업 이다. 이것은 국가 차원의 희생 실태를 파악하고 유해발굴을 통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한편 향 후 국가 주도의 유해 발굴 형성을 확립하여 룏2007 년 진실화해위원회 한국전쟁 집단희생 유해발굴 단룑을 구성했다. 그 결과 최근(2008년 9월~11월)에 진도 갈매기 섬의 전설을 따라 민간인 집단희생자의 유해 매장 지와 유해발굴조사를 충북대학교 조사단(단장 박 선주박물관장)에서 시작했다. 조사단은 갈매기섬 유해발굴 조사에서 아래와 같이 밝혀냈다. 3부 갈매기섬의 비밀 띆 진실은 화해를 원한다 탄 피 굛 탄 두 등 출 토 … 확 인 사 살 까 지 현대사의 진한 아픔이 배인 진도 갈매기섬. 역사의 아픔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또다시 힘찬 해가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