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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만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울고 웃던 감격의 날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한순간 분단된 국토에 좌우로 대립된 사상적 갈등은 날로심하여 우리 겨레의 시야를 혼미케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선생께서는 분연히 민족자주독립을 지상명렬으로 하는 자유와 민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우리 국토를 미소 공동의 관할하에 두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최전열에 서시어 대한독립촉성 국민회의 준비결성부터 그 상임위원과 중앙훈련대장을 겸임하시고 한편으로는 국민회 청년단의 감찰대장을 역임하시면서 낮밤없이 건국의 터전을 닦으셨다. 어찌 그뿐인가 동국대학과 국화여자전문학교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새나라 교육의 밑거름이 되시기도 했다. 이 나라 이 겨레의 역사가 면면히 흐르고 뒤에 자란 총생들이 번영을 누릴진데 건국의 주석이신 선생의 공과 덕이 이 어찌 영원토록 묻히랴. 선생께서 우리고장의 뜨거운 성원과 박수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된것은 고로에서 나 어린 초동에 이르기까지 두터운 신망을 모은 당연한 결과였다. 의정 단상에 서신 선생의 모습은 마치 중림출허에 비길만큼 출중하셨다. 그 활약상은 염결과 강직으로 불의와 맞싸우며 바른일에는 언제나 솔선수범하셨다. 대충 간추린바 신생 대한민국의 기틀을 짜는 헌법기초위원과 법제사범위원 그리고 농민대중과 서민근로층의 권익옹호를 이한 3.1구락부 이정회 대한민국당등에서 원내 조직과 호라동에 있어서 항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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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주스런 북한괴뢰군은 목숨마저 앗아간 만행을 저질렀으니 분하고 원통하다. 1950년 9월 28일 한창 일하실 41세를 일기로 광주형무소에 그들의 마수에 쓰러지시니 민중의 참벗을 잃은 우리들은 다시한번 6.25 참극의 비분을 가눌길이 없다. 선생께서 순절하신후 가족에게 물려주신것은 오직 씻은듯한 가나뿐 선생이야말로 진정남의 어려움엔 온후한 눈물로 보살폈고 정작 내붙이와의 사사로운 정에는 야속하리만큼 냉엄하여 청렴결백으로 일관하셨다. 공수래 공수법라더니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떠나신 분이다. 평생을 호구가 어려운 사람으로 공인생활에 티 한점없이 후진의 귀감이 되시었다. 이 새김돌에 청태를 입히고 풍마로 깎이는 먼 훗날까지 지나던 길손들은 삼시 머물러 향기로운 선생의 영생에 고개숙여 삶의 참뜻을 되새겨 볼지어다. 세상에 태어나 참되고 장하게 일을 하면 비록 이승을 떠서 그 육신이 진토가 되더라도 그 정신은 노상 살아있는 이웃과 더부러 이 누리를 더욱 빛나게 할것이다. 그러기에 선생의 덕과 능과 의를 겸전한 푸른 발자취는 우리로 하여금 따르게 할것이며 길이 길이 이 땅에 횃불을 밝혀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