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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김돌을 여기 세운 까닭은 우리 모두가 받들어 기리며 본받아 마땅할 제헌국회의원 석계 유성갑선생의 참되게 살아가신 생애를 널리 전하고저 함에 있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노니 뉘라서 인생을 아침 이슬과 덧없이 흘러가는 부운에 비기리오. 즈믄세월 만인의 걸음을 멈추게하며 바르게 살다가신 선생의 그 높고 맑은 곧고 바른 행적이 빛을 뿜으리라. 선생께서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시어 네살때 이미 천자문을 깨치셨고 옛 성현의 경전에 두루 통달하시어 뛰어난 시문으로 항항시 주위를 놀라게 하셨었다. 그러다가 신학문에 눈을 뜨셔 열아홉되던해에 笩橋송명학교에 편입 1930인 스물한살에 편입 1930년 스물한살에 불문에 귀의하셔 하동산선사의 높은 가르침에 일신을 연마하시다가 대붕의 뜻을 펴고저 도일 대정대학예과를 거쳐 1943년에 일본대학 법문학부를 졸럽하셨으니 선생은 나이 서른세살적이이었다. 낯선 이국에서 고독과 기한을 딛고 면학하던 이 시절의 7,8년은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점철된 형극의 길이었다. 특히 1939년 5월에는 망국의 한을 품고 옥중의 이슬로 사라지신 안중근의사의 사진과 독립선언문을 간직하시다가 왜경에게 발각되어 반년동안이나 영어의 몸이 되시었다. 또한 일제침략의 제물로 강요당한 학병을 기피하여 황량한 만주벌에 몸을 숨기시고 통화성 칠도강란곳에 한국인 국민학교를 세워 장차 쓰여질 나라의 인재를 기르는데 심혈을 쏟으시다가 꿈에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맞아하셨다. 어둠속에서 태양이 솟아오른 8.15해방 그날은 태극기가 삼천리를 수놓아 춤을 추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