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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참변은 소록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은 한겨례21의 소록도에 대한 기사의 일부이다. 한센인 김기영(78·소록도 거주)씨는 “소록도라고 6·25의 상처를 피해갈 순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9살 때 병에 걸렸다. 광복 2년 전인 1943년 10월21일 소록도에 입소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섬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1950년 8월5일 인민군 40여명이 쌀자루를 둘러매고 소록도에 상륙했다. 그들은 소록도에 인민위원회를 만들었다. “그저 장난이겠거니” 했는데, 위원장으로 뽑힌 문창열은 박현주·조중식 등 다른 한센인들을 모아 소록도에서 인민 재판을 열려고 했다. 다행히도 그날 소록도 상공을 날아가던 비행기에서 “아군의 승리로 수도가 회복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전단이 뿌려졌다. 겁을 먹은 문창열 등 6명은 자치회 공금 100만원을 훔쳐 장흥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패주하는 인민군을 따라붙었지만, 당시 소록도 원장 김상태가 보낸 첩자로 오인받아 인민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김씨는 “그들은 죽어 장흥 관산읍 죽정리 모래밭에 묻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