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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은 외솔 최현배 선생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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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1일 독립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메, 삼천리 각처에서 우뢰같이 호응궐기하였다. 울산에서는 병영 청년회 간부 양석룡, 이현우 이종욱, 이문조, 박영하, 이종근, 김장수, 이종필 등이 몰래 모의 획책하여 사월 오일 오전 아홉시에 병영 일신학교 학생들의 합세를 얻어, 대한독립만세란 깃발을 앞세우고, 큰길로 나아가다가, 울산읍에서 급히 달려온 일본 수비대와 순사 수십명에게 십여 명이 잡혀갔다. 그 이튼날에는 남아 숨었던 청년회 간부들과 문성초, 윤학이, 최현구, 황정달, 백봉근, 들의 합동 획책으로, 전날보다 더 큰 기세로써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큰길과 성뚝으로 행진하니, 미리와서 기다리던 성밖 촌락의 많은 사람들도 함께 참가하여, 만세소리가 성안천지에 가득찼다. 노도같은 군중들은 경찰주제소로 돌진하자, 때마침 울산읍으로부터 몰아닥친 수비대 일병들은 주모자 여럿이를 읍으로 잡아보낼새, 수천 군중은 한결같이 만세를 부르면서 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여 수비대를 포위하였다. 무자비한 일병의 쏘는 총탄에 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용 네 열사는 그 자리에서 순사하고 송근찬, 김규식, 김두갑 서이는 중상을 입었다. 절치부심의 통분을 무엇으로 형언하랴, 이때 철창에 구속된 모두 22명에 2년 내지 6개월의 징역형을 받은이가 17명, 태형 5명, 무죄 명이었다.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속에서, 겨레의 자유 정신을 세계에 선포하고자 우리고장의 청년용사들의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하던 모습을 길이 후세의 거울로 전하고자 이 충홍비를 세운다. 1967년 4월 5일 최현배는 글 짓고, 조원규는 글쓰고 새김 병영 삼일사 재건 기성회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