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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가을에는 대한제국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 봄에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났으나 많은 애국지사들이 역도로 몰리는 시대에 일본의 꼭두각시 판사로 부귀영달을 누린들 무엇하랴, 하고는 부임을 거부하였다. 1910년 마침내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고 민족의 역사가 끊어지자 전 생명과 재산을 바쳐 국권을 회복할 것, 을 결심하고는 만주로 가서 양제안, 허 혁, 이상룔 등 독립지사들과 독립군 군관학교 설립을 의논하였고 중국의 신해혁명(1911)을 몸으로 배우고자 중국 각지를 순찰하였다. 29세 되던 1912년에 귀국하여서는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거점 확보를 위해 천석군 재산이 넘는 논밭 900두락을 내어 평양의 김덕기 전주의 오혁태와 더불어 상덕태상회를 대구에 설립하고는 전국 곳곳과 만주 및 중국까지 지점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달성군 안일암에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동지들과 조선국권 회복단을 결성하였고, 또 중국에 가서는 손문을 만나 군관학교에 한인특설부를 두게 하여 독립사관 양성의 길을 열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독립 의군부에 가담하고 신흥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15년에는 드디어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에서 채기중이 이끌던 풍기광복단을 통합하여 대구 달성공원에서 200여명의 독립지사들이 모인 가운데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총사령으로 추대되었으니, 이 단체는 박의사를 비롯하여 채기중, 우재룡, 장두환, 김한종, 이관구, 권영만, 장순필 등과 후일에 가입한 김좌진, 노백린, 신현대, 윤홍종 등등 쟁쟁한 독립투사들이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 활동한 거국 거족적 독립운동단체였다. 일찍부터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군대와 힘이 있어야 함을 통감한 의사께서는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불법 징수한 세금을 경주에서 탈취하여 독립자금에 넣고 데라우치 총독암살을 시도하였으며, 허왕산에게 독립자금 20만원을 약속하여 경상관찰사가 되고는 약속을 어기고 독립투사들을 고발한 칠곡의 악질 친일부호 장승원과 아산의 악질 친일 반역자 도고 면장 박용하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고, 재력가를 몰래 찾아다니며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등 종횡무진 활동하였으니, 그 노고와 울분이 어떠하였겠는가! 이렇게 동분서주 불철주야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애쓰던 의사께서 1918년 1월 생모의 상을 당하여 녹동에 왔다가 수 백명의 일경에 체포되어 그 후 4년간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받고서도 끝내 대한광복회의 조직과 독립자금 헌금자의 명단을 자백하지 않음으로써 수많은 동지들의 목숨과 재산을 건져 주고는 1921년 8월 11일 창창한 38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니, 아 슬프다 단군의 피를 받은 자 그 누가 가슴 쳐 통곡하지 않으며 눈물로 피를 쏟지 않겠는가! 임종에 이르러 "다시 나기 어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