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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혁 경무관 추모비 이 땅이 사나운 짐승 소리를 내지르며 전쟁의 불길에 휘몰려 있을 때 이 땅에 핀 생명들 폭풍 앞의 꽃잎처럼 형벌의 피에 물들 때 진정한 소신과 기개로 어두운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한 획을 긋고 사라진 사나이 소년 시절에는 중국땅에 망명하여 항일전선에 참가하였고 이윽고 다시 찾은 고국 땅에 돌아와 곧이어 터진 비극의 한국전에 호국군 청년방위대 구국의용대 전투경찰대대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엄중한 임무를 맡았고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으로 토벌전을 지휘했지만 깊은 인본정신 살과 뼈에 사무쳐 포용과 인간애를 잊은 적이 없어 적들의 은신 소굴이 된 천년 고찰 불태우라는 엄혹한 상부의 명령 앞에 문짝만 뜯어 법당 앞에 쌓아 불지르며 절을 태우는데는 한나절이면 되지만 절을 세우는데는 천년이라며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등 지리산 일대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잿더미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한 간담 서늘한 일화를 남긴 어느 역사에도 드문 문화 보전의 기록은 오래 인구에 회자되어라. 자신의 공적보다 적이라는 이름으로 스러진 생명들 전쟁에 찢기고 흩어진 고혼들 지극한 독경으로 달래주며 죽은 자에게 좌우와 이념이 어디있느냐며 깊고 넓은 자비를 생각하던 인간 중의 인간이여 전쟁의 시련과 암울 속에 짧은 생애를 파란만장하게 살다갔지만 이 땅의 혈맥 기억의 아픈 마디에 뜨겁고 치열한 그의 혼은 남아 감사와 훈장 공적비로 기리나니 차일혁님이여 여기 그 이름 깊이 새겨두나니. 시인 문정희 짓고 차길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