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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읍에 문의한 결과, 다행스럽게 예비군 중대본부에서 비문이 있다고 연락이 왔다. 위령비의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도가 행해지고 있을때는 일부일부(평범한사람)라도 그 뛰어난 행실이 있는 경우 역사에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였다. 하물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경우에는 나라에서 포상하고 들에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우리나라는 지난 을유년(1945) 회춘하여 도적들이 도망하였으니 우리 민중들은 기뻐하여 환호작약하지 않는자가 없었다. 그러나 운수가 불길하여 국토가 분단되고 동족상잔을 하게되니 이는 누가 시킨것인가? 경인년(1950) 난리가 나서 참혹한 화가 8,9세의 어린아이까지 미치었으니 군경과 같은 경우 어찌 몸을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국가에서는 합동위령의 전례가 없을 수 없으며, 비탑을 세우는것이 없을 수 없으나 아직 정돈이 되지않아 은혜가 죽은자에게까지 미치지 못하였다.그 고혼이 광막한 들에 방황하고 있구나. 최군상학(崔翔鶴)은 일찍이 불서를 많이 읽고 탁방하여 운수하였으나 그 사람됨은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아는 이였다. 지난해 옥신사 (玉神寺)를 무릉산 골짜기에 창건하였으나 매번 순국군경의 충혼이 의지할곳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이에 분연히 원근에서 녹화(불교행사를 하기위해 시주를 받는것)의 도움을 받아 돌을 채석해와서 절옆에 비석을 세우고 조석으로 분향하고 그 명복을 빌었으니 이는 仁人君子의 마음 씀이라하겠다. 어찌 훌륭하지않겠는가? 한산의 돌에 새긴것과 방불한 것이다. 이는 삼생의 인과지설에 깨우침을 얻은것이다. 이 땅에 충열이 되어 국가를 보호하는것으로 태산에 안치된것이다. 아는 이에 명을 붙이니 다음과 같다. 몸을 잊고 나라를 목숨바쳤네. 만고의 청사에 빛나리. 한조각 돌에 새기노니 우리 영령을 위로하리 1953년 9월 정병찬이 글을 짓고 이원학이 글씨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