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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 - 참호속에서 적의 포격을 피하는 국군 / 적방향 고지를 살피는 미군들 휴전회담이 개시된 후부터 한국전쟁은 세계 전사상 처음 보는 제한공격이라는 전법을 채택하게 되었으니, 당사국인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산군과 유엔군은 함께 휴전의 성립을 희망하여 서로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다만 진격을 감행하지 않을 뿐이지 거의 고정된 전선에서의 근거리 고지 쟁탈전은 치열하였으니, 한 능선.한 고지에서 퇴각과 탈환을 20여 회 이상 거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52년 8월부터 공산군은 후방의 병력과 장비를 보강하여 8월 5일 국군 수도사단이 지키는 김화 등 북방의 수도고지에 공격하여 왔다. 전례없이 포격을 강화한 적은 1일 평균 2만 발을 발사하여 인해전술로 육박해 8월 10일까지 6일 만에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갈리었다. 이러한 싸움을 9월 28일까지 계속하여 아군은 고지를 확보하니 29일에는 개전 이래 최대의 포격으로 4만 8천 발을 수도사단 지구에 퍼붓고 다시 방향을 돌려 백마고지에 공격해 왔다. 백마고지는 국군 제3사단.9사단 및 미 제2사단 등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10월 29일까지 1개월 사이에 25회 이상 고지의 주인이 바뀐 끝에 아군은 한걸음 진격하여 철마고지까지 점령했으며, 이 동안의 접전은 주로 백병전이었다. 한편 수도고지와 백마고지 사이에 있는 저격능선에서도 10월 초부터 맹령한 적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동측 요충으로 적의 주요 진지인 오성산에 대치하는 지점이다. 이 지대는 국군 제2사단이 당하고 있었는데 4일간 전투에 17회나 능선의 주인이 바뀌었으나 12월 21일 저격능선의 암석봉에 공격해 오는 적을 네 번이나 격퇴시키자 평온상태로 들어갔다. 이 해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후 4월 6일, 5개월 만에 휴전회담이 재개되고 11일에는 상이포로 교환협정이 결정적으로 성립될 단계에 이르자 적군은 5월 초순부터 전전선에 걸쳐 공세를 취해 왔다. 그리하여 5월 12일 중동부 전선에 약 4만 5천의 병력을 투입하고 12시간 동안에 11만 8천 발의 포격을 가해 약 3Km 후퇴했으며, 동부전선 단장능선, 서부전선 연천지방도 심한 공격을 받았다. 7월 16일부터 아군은 총공격을 개시, 휴전을 앞두고 전략상의 요지들을 확보하려던 적의 공격을 격퇴시키고, 20일까지는 앞서 잃었던 지역의 대부분을 탈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