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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역사나 공원에서의 노숙도 허다했다. “메구로가조엔은 복원될 것이 다. 그리고 그건 내가 할 것이다.” 라는 믿음을 주위 사람들은 비웃었 다. 하지만 1988년 메구로가조엔은 복원되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났 다. ‘오젠’을 수리했던 한국의 칠장이를 기억한 메구로가조엔 경영주의 제안. 관심 있으면 한 번 오기나 해보라는 투였지만 그들은 2년간 인간 전용복이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2년간 메구로가조 엔의 복원만을 연구해온 그의 도박에 운이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내로라하는 일본 장인들이 다녀간 뒤 전용복 선생이 메구로가조엔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새파란 장인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 보는 일본인들에게 2년의 연구결과와 그 속의 한과 땀을 다 쏟아냈 다. 현장에서 작품의 복원 가능여부를 판단하는 자리에서 전용복 선 생은 일본의 장인들도 포기한 작품들 사이에서 복원 가능을 외쳤다. “배짱이지. 인간이 한건데 불가능한 것이 있겠느냐. 어릴 적부터, 그 리고 해병대 시절에 어떤 어려움도 내 의지와 내 손으로 해결이 되는 것을 터득을 했기 때문에, 이 정도면 힘들겠지만 할 수 있지 않겠느 냐 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는 부산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의 연락을 기다린 지 한 달 두 달이 지나도록 소식은 오지 않았다. 빚은 늘어갔고 신용은 바닥났 다. 공방을 운영할 여력도, 사람도 없었다. 술로 마음을 달랜답시고 어두컴컴한 작업장에서 혼자 망가져만 갔다. 4개월 후. 일본에서 메구로가조엔의 복원 공사 중 옻칠에 관계된 모든 일을 맡기겠다는 전화가 왔다. 그 전화를 받고 그는 울음을 터 뜨렸다. 다섯 명으로 시작한 복원작업. 1989년 9월 전용복은 가족과 제자를 이끌고 이와테현 가와이무라의 폐교에 작업실을 열고 복원을 시작했 다. ‘대한민국 예린칠예연구소’ 라는 작업소의 현판은 해병대의 빨간 명찰처럼 빨간바탕에 노란글씨였다. 그들은 3년의 공사기간을 맞추 기 위해 정말 목숨을 걸고 일했다. 피로한 몸에 피부는 옻으로 부어 오르고 진물이 흘렀지만 그들의 눈만은 광기에 휩싸인 장인의 눈 그 대로였다. 3년 뒤인 1991년 11월 13일. 메구로가조엔이 다시 문을 열었다. 일장 기와 함께 펄럭이는 태극기. 다 함께 외치는 만세와 아리랑 노래 속 에 긴장이 풀린 전용복 선생은 기절 하고 말았다. “사람이 긴장감을 풀어버리면 피로가 엄습해서 힘들더라고요. 그리 고 기쁨보다는 좀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죠.” 조선시대 칠장이는 천민 중의 천민이었으리라. 칠장이 전용복이 처 음 메구로가조엔을 복원하는 일을 맡았을 때도 한국에서는 그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가장 명장다운 장인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존경받고 있다. 일본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그의 작 품은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그가 디자인한 ‘전용복 칠예시리즈’ 손목 Vol. 37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37 Peoples 모진 바람을 이겨낸 꽃이 더욱 아름답다. 그를 키워준 그 기억은 비 단 해병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궈 낸 성공이 광복 후 물거품이 돼버린 탓에 술에 삶을 빠뜨려버린 아버 지와 갑작스러운 장남(전용복의 형)의 죽음에 정신적인 장애까지 안 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과일과 국화빵을 팔 고, 연탄을 배달해야 했던 그였다. “그 열악한 환경이 인생을 더 바르게 살게끔 만들어 주지 않았나 싶 어요. 오히려 우리 부모님께 감사해요. 어떠한 풍랑에도 쓰러지지 않 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모진 교육을 시킨 것이 아닌가. 그 교육이 없 었던들 내가 있을 수 있었나 싶어요.” 어려운 가정환경에 과일바구니와 연탄을 들춰 메야 했던 어린 가장이 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예술가의 꿈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화가 인 외삼촌들의 어깨너머로 보던 그림은 그에게 예술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주었다. 동네 어귀 나전칠기 가구 를 만드는 기술자들의 단순 작 업은 ‘더 예술적으로 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해병대를 전역하고 목재회사에 입사한 것은 어릴 적 구상이 실현되 는 통로가 돼주었다. 한 번 하면 끈질기게 해내는 그의 성격은 젊은 나이에 꽤나 큰 성공을 안겨주었다. 1978년 당시의 그의 월급은 57 만 원이었다. 1종 고용직 공무원의 월급이 4만 4천 원을 밑돌던 시절 이었다. 27살 나이에 회사에서 차와 기사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전용복 스타일의 가구를 만들어 보 겠노라는 열망이 커져만 갔다. 회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표를 낸 뒤 차린 예린공예사. 그가 디자인한 가구들은 신선했고 세련됐다. 매번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가 무섭게 최고의 가구매장에서 사들이기가 바 빴다. 가구를 만들며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던 그의 눈을 붙잡은 것은 도자기 위에 옻칠을 한 ‘와태칠 기법’ 이었다. 독학으로 1,200년 전의 기술을 깨우쳐가며 그는 옻칠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은 얘기치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일본 내에서는 수선하기가 힘든 오젠이라는 밥상을 저에게 가져왔 어요. 처음에는 손상된 부분만 수리하여 내밀었는데, 새것처럼 만들 어 달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 오젠을 깔끔한 새 밥상으로 만든 것 이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죠.” 그 밥상 하나에 만족한 일본인은 밥상 1,000개를 수리해주라는 의뢰 를 한다. 중국집의 밥상 정도로만 알았던 오젠은 일본 최대의 문화재 급 연회장 ‘메구로가조엔’ 의 밥상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일 본으로 진출한 그는 곧 메구로가조엔을 철거하여 복원하게 될지 모 른다는 소식을 접한다. 물론 가정이었다. 이를 철거하여 아파트나 빌 딩을 짓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사람들이 복원을 해야 한다면이라는 상상을 한 거죠. 그 당시 내 실력으론 당연히 할 수 없었죠. 하지만 몇 년이라는 시간이 있으 니 준비를 하면 건물을 복원할 때 내가 참여를 할 가능성이 있겠구 나. 물론 미비한 가능성이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시작 했어요.” 33살의 나이에 대학교 일어과에 진학하고 수시로 일본을 드나들며 일본과 한국의 옻칠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해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던 형편. 신칸센을 무임승차하는가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