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page

37 ● Story _ Review ROKMC 36 VOL. 36 지난 9월 1일. 제주도 동문 로터리 일대에서 ‘해병대 주둔 표지석 제막식’이 열렸다. 60년 전 해병대 사령부가 주둔했음을 기념하기 위 한 행사. 해병대는 1949년 12월 28일 제주도로 이동하여 한라산의 공비를 토벌하고 4·3사건으로 피폐된 제주도의 민심을 수습하는데 전력투구한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준 비가 부족했던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된다. 국가의 운명 이 풍전등화와 같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제주의 젊은이 3,000여명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입대한다. 이들이 바로 해병 3·4기. 16살, 17살밖에 되지 않은 중학생, 고등학생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인민군과 중공군을 격퇴하기 위해 결사 항전했다. 전쟁의 전세를 뒤엎은 인천상륙작전의 주역도 이들이었고, 수도 서울을 수복한 것도 이들이었다. 미 해병대 도 공략하지 못한 도솔산 지구를 점령해낸 것도, 휴전하는 그 날까지 한 뼘의 영토라도 더 확보하고자 피를 흘린 것도 이들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대한민국, 지금의 해병대는 제주 해병 3·4기가 있었기에 존 재하는 것일지 모른다. 60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꽃다운 젊은이들은 백발이 성한 노해병 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기억들을 주섬주섬 꺼내는 그들의 목소리 와 눈빛에는 아직도 구국의 일념과 열정이 살아 숨 쉬는 듯 했다. “당시 지원하는 사람이 몰리다보니 체력검정을 해서 걸러냈어. 나 이가 안 되거나 키가 162cm 정도가 안 되거나 달리기를 못하거나 하 면 탈락을 시켰거든. 그런데 탈락을 한 사람들이 혈서까지 써가면서 해병대에 들어가려고 한거야.”(최형권, 77세)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알기도 했고, 4·3사 건 때 공비들에 의해 양민들이 학살되는 것도 봤었지. 한마디로 구국 일념에 의해 출전한 거지. 나라가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냥 공 부만 할 수 없었어.”(김동학, 78세) 8월 5일과 8월 29일 각각 입대한 3,000명의 3·4기생들은 훈련 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9월 1일 제주 산지항을 출발한다. 부산에 도 착해서야 군복과 무기를 지급받은 이들은 9월 11일 거대한 수송선에 탑승한다. 전세를 뒤엎을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기 위함이었다. “상륙을 하기 전에 얼마나 포를 때렸던지 온통 암흑천지였어. 상륙 할 때 적의 반격도 있었지만 생각만큼 제대로 기를 못 쓰더라고. 항공 기와 함포로 완벽하게 적을 압도해버린거지”(김석진, 81세)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해병대는 미 해병대와 함께 인천 시가지를 거쳐 서울수복에 나서게 된다. 미군과 함께 작전을 할 당시의 추억을 꺼내놓는 노해병. “상륙 다음날인 9월 16일 아침부터 미군처럼 C-레이션만 먹기 시 작했어. 얼마나 맛이 없던지. 서울로 진격해서 주둔하는데 추석 이틀 후인 9월 28일 날 주민들이 선뜻 밥을 해주더라고. 13일만에 처음으 로 뜨끈뜨끈한 추석 밥을 먹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박영찬, 77세) 인민군 치하에서 시름하던 서울의 주민들에게 우리 국군, 우리 해 병대는 따끈한 쌀밥만큼이나 반가운 존재였을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펜 대신 총을 잡았던 학생들 이제는 노병이 된 제주 해병 3·4기를 만나다 “집집마다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들이 잔뜩 걸려있었어. 수색을 하 다보면 지하에서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가족들도 있었고, 인민군에 게 끌려갈까봐 다락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 청년들도 많았지. 한강 백 사장에 인민군이 학살한 양민들의 시체가 널려 있던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김석진, 81세) “트럭을 타고 서울 시내를 이동하는데 전투할 때는 숨어있던 수많 은 사람들이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마중을 해주는 거야. 주민들 과 우리 모두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격스러웠지. 그 때의 기분을 잊 을 수 없어” (김동학, 78세) 서울수복에 성공한 해병대는 다시 인천을 출항하여 묵호, 원산, 고성에 상륙하여 북진 작전을 개시한다. 미 해병대와 떨어져 단독으 로 작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와는 달리 보급 상 황이 좋지 않아졌다고 한다. “하도 먹을게 없으니까 옥수수를 따다가 철모에 볶아서 먹었거든. 근데 너무 볶아대니까 철모 반대쪽이 반들반들하게 돼서 반짝반짝 거리는 거야. 그래서 장교들이 눈밭에서 적에게 발견될 수 있으니 그 만 좀 볶으라고 얼마나 난리를 쳤다고. 그런데 웬걸 나중에 되니깐 중대장, 소대장 철모도 반짝반짝 한거야” (박영찬, 77세) 웃으면서 에피소드를 전해준 노해병은 딱딱한 옥수수를 씹느라 십대 때 이미 어금니가 다 나갔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악 전고투를 하며 북진을 하던 우리 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 를 하게 된다. “중공군이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다섯 명에 한 명만 총을 쥐어 주는 거야. 나머지 중공군은 맨몸에 수류탄만 들고 진격을 하는 거지. 앞 사 람이 죽어서 총을 떨어뜨리면 그걸 집어서 돌격하고.” (김석진, 81세) 중공군의 공세에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던 우리 해병대는 재반격 에 나선다. 중동부전선을 무대로 ‘무적해병’의 명예를 얻게 된 도솔 산 지구 전투를 비롯, 김일성고지, 모택동고지 등 여러 전투에서 용 전분투하여 한국 해병대의 용맹을 세계만방에 널리 선양했다. 하지 만 이 짧은 문장 몇 개로 표현 해버린 이 승리를 위해 제주 해병 3·4 기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렀다. 사선을 넘고 넘어 일궈낸 해병대의 명예. 그 뒤에는 십대의 나이에 쓰러져간 전우들의 죽음이 있었다. 60년이 지난 지금, 노해병들에게 전우의 죽음이란 어떤 기억일까. “전투에서는 옆에서 누가 쓰러지고 죽어도 슬플 겨를이 없었어. 전 우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고 해도 당장은 오로지 적밖에 안 보이는거 야. 전투가 끝나면 그 때 그 기분은 말할 수도 없지. 울고불고 난리가 나는 거지. 그 기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지..” (김석진, 8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