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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훈련단 상승관 앞에서 400여 명의 동기들 틈에서 함께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고 눈물을 훔치고 계 시는 어머니를 바라볼 수 없어, 어머니를 남겨두고 도저히 발이 떨어질 거 같지가 않아 최대한 빨리 등을 돌리며 동기들 손을 붙잡았다. 신병 제2교육대로 발을 돌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2년이라는 세월 이 훌쩍 지나 병장 계급장이 퍽 어울리는, 남은 군 생활보다 전역 후의 내 미래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즈 음이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입대 전 가수로서 창작가로서 배우로서 방송인으로서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해오던 “이정”이라는 이름 으로 10년 가까이 살아온 나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한 군 입대를 떠들썩하게 언론에 알리고 싶지 않았 다. 정말 조용히 입대를 하고 싶었다. 심지어 같이 입대한 동기들 중에도 “우와.. 이정이랑 진짜 똑같이 생 겼다..”라며 내가 바로 그들이 얘기하는 진짜 ‘이정’이라는 생각도 못한 동기들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데 뷔할 때부터 어머니와 누나를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집안 사정으로 인해 군 입대가 많이 늦어졌지만 군 입대를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고 나는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수많은 연예계 선배들의 군 생활을 봐왔던 나는 ‘연예병사’라는 말 자체도 싫었고 내 개인적인 생 각엔 그런 연예병사로서의 생활들은 무척이나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물론 내가 직접 생활을 안해 봤 기에 단정 지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때 당시엔 그랬다. 그래서 나는 군대를 가면 다른 대원들과 함께 훈련 도 받고 생활관 생활도 함께 하고 진정한 해병대로 거듭나고 싶었다. 내 특기를 발휘하지 못하는 시 간이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던 건 사실이지만 군 생활을 통해서 분명 배울게 있다고 생각했고 삼군 중에 유 일하 게 연예병사 제도가 없는 해병대를 택하게 되었다.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또 해병으로 만들어지는 신병 교육 훈련 기간 중에도 연예인이라는 선입견을 없 애기 위해 많게는 10년 차이가 나는 동기들과 생활하면서 누구보다 모든 훈련과 과업에 성실히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하였고 결국엔 내 진심이 보여질 수 있었고 빨간 명찰을 처음 가슴에 맞이할 때에도, 수료 후 부대배치를 받고 도열을 할 때에도 그 누구보다 가슴 벅찬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부대 배치 후 나에게 주어진 해병대사령부 인사처 모병홍보병이란 직책으로 낯선 곳에 처음 와서 선 ·후 임간의 예의도 배워야 했고 간부와 병 사이의 예의도 그리고 새로운 환경과의 모든 질서와 군인으로서의 마 음가짐과 “가수 이정”이 아닌 “해병 이정희”로 생활을 해야 하는 방법을 배우고 찾아가며 차츰 해병으로서 담 금질이 시작되었다. 입대 직후 개인적인 안 좋은 일들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유격, 사격, 수류탄 투척 훈련 등 훈련을 받 으며 흘리는 땀으로 잊어버릴 수 있었다. 특히 해병공수 166차 교육의 기회를 어렵게 얻게 되어 하 늘을 날아오르면서 낙하산 하나에만 의지한 채 그동안 쌓였던 모든 설움과 힘들었던 일들도 어느 정도 떨 쳐버 릴 수 있었다. 또한 모병홍보병 직책으로 각 지방 병무청 및 각 대학 등을 다니면서 군 입대자에게 해병대를 홍보 하고 모집하는 업무를 지원하면서 해병대로서의 자부심을 느꼈었고, 조직과 나에 대해서 돌아 볼 수 있었던 소 중한 시간들이었다. 이렇듯 나는 해병대가 아니었다면 느낄 수 없었을 이 많은 가르침에 다시 한 번 감사 함을 느끼고 내 자신을 돌아보고 단단하게 단련되고 성숙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해 병대 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가슴 벅차는 감동을 어찌 느낄 수 있었을까? 이제 전역 후에도 군 복무를 하면서 수많은 일들을 겪고 그 속에서 나에게 왔던 모든 가르침들을 고스 란히 간직한 채 해병대 출신으로서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역할을 다할 것이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 병’이며,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서 북도 서 및 전·후방에서 교육훈련과 경계근무에 최선을 다하는 해병대 장병 및 국군 장병들의 노고에 감사 함을 느끼며 작지만 강한 군대인 내가 사랑하는 해병대의 건승을 기원한다. *해병대 생활을 마치며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