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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 November 2009 | 해병대 I 장병 가족수기 / 문예활동 "축구 잘하는 놈이 누구냐?" 6주간의 초군반 신임 장교교육을 마치고 처음 부대배치를 받아 대대상황 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한 중대장님께서 허겁지 겁 상황실로 들어오시면 외치셨다. 나는 무의식적으 로 손을 들었다. 대학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내 옆 에 앉아있는 동기 녀석이 나보다 훨씬 잘하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덩치도 작고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 니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무기였다. 그리고 그 중대 장님을 따라 7중대에 배치 받았다. 그때부턴 축구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축구할 때는 심장이 터져라 죽도록 뛰었다. 그때 중대장님은 축 구 잘하는 소대장을 다른 중대에 빼앗기고 싶지 않 아 숨이 넘어가도록 상황실로 뛰어오셨던 것이고, 중대장님에게도, 중대원들에게도 나는 축구 잘하는 소대장이었기 때문이다. 사단체육대회 때의 일이다. 갓 화기중대장에 부임 했던 나는 소대장 시절 기마전에서 대왕마에 올라타 연대를 기마전 우승으로 이끌었다는 이유로 기마전 담당 장교가 되었다. 나는 단기장교로 중대장 직책 을 맡을 군번이 아니었으나, 대대에 장교가 부족하 여 화기중대장을 맡게 되었었다. 기마전 담당이긴 하지만, 연대에서는 기마전은 지난 대회 우승 종목 이고, 내가 체육대회 담당 장교 중 군번이 가장 늦 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우수한 대원들은 다른 종목 에서 다 차출해가고 남은 인원들을 데리고 경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부담이 컸다. 연대에서는 지난해 에 이어 당연히 우승하는 종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 으나, 여건이 좋지 않았다. 대대장님을 찾아가 상담 을 의뢰했다. 손수 바둑알을 옮겨 가시며 전술을 전 해주시고는, "전투력은 부대원이 누구냐가 아니라, 어떻게 훈련받은 대원이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 씀을 주셨다. 용기가 났고, 희망이 보였다. 각 부대 기마전 연습하는 시간에 찾아가 상대전술을 파악하 여 우리의 전술을 만들고, 우리 연대 훈련에 최선을 다했다. 내가 솔선수범해야 대원들도 힘이 난다는 생각에 기마전 훈련시간에는 항상 제일 먼저 나가 대원들을 기다렸다. 결국, 내가 담당했던 해에도 우 리 연대가 기마전 우승을 차지했고, 기마전 참가 대 원들은 모두 포상휴가를 나갈 수 있었다. 다양한 사 회 경험 속에서 말로만 들어와서 몸으로 느끼지 못 했던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 서도, 용기와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은 없구나!’ 나는 전역 후, 해외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일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시절 학군단 생활을 했던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외국에 살다온 친구들 도 많고, 대학시절 연수를 다녀온 친구도 많았지만 나는 순수 국내파였다. 기업 입장에서 나 같은 경력 을 환영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해병대의 경험이 있었다. '용기와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은 없 다!' 내 약점을 보완하고자 장교생활을 하며 모았던 작은 돈으로 짧게나마 어학연수를 갔다. 많은 한국 학생들이 연수를 가서 방탕한 생활을 했지만 목표가 확실했던 나는 현지인과의 관계와 어학실력 향상에 전력을 다했다. 부족한 돈으로 배고픔을 참아가며, 외국인들 앞에서는 항상 웃어야 했던 그 순간순간은 군 생활만큼이나 감내의 시간들이었다. 한국에 돌아 와서는 내가 목표로 했던 회사의 모든 것을 조사, 분석했고, 철저히 입사준비를 했다. 결국, 나는 지금 내가 일하는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고, 현재는 전 세계를 누비며, 외국 사업주들과 각종 사업을 진행 중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자기 업무에 흥미를 가 지기 보다는 억지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내가 목표로 했던 회사와 업무를 하고 있는 만큼 나는 업 무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사람들이 나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있다. "이 친구는 해병대 출신이 야." 이 한마디가 나에게 책임감을 갖게 하고, 더 노 력하게 만든다. 그 한마디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 든다. 우리는 가슴속에는 같은 무언가가 있지 않은 가... 해병대라는 한마디에 뜨거워지는 가슴의 무언 가가... 희망 글 / 안현규 해병대 중위로 전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