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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 www.rokmc.mil.kr | 아 !!!!! 고구려... 국내성은 고구려 왕조의 두번째 도읍지로서, 졸본 성으로서는 더 이상 큰 나라로 성장할 수 없는 지리 적 여건을 감안하여 2대 유리왕이 서기3년(유리왕 22년)에 이곳으로 천도하였으며 서기 427년(장수왕 15년)까지 약 400여년동안 고구려의 도읍지였다. 차에서 이동하는 동안 가이드가 국내성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였다. 국내성은 둘레 2,686미터, 넓이 13,000평방미터, 높이 6미터의 성으로써 성의 원형 은 많이 손상되었지만 고구려 성곽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어 우리나라 성곽축조 양식의 기원을 규명해 주는 중요한 유적지이며, 잘 다듬은 네모꼴의 돌로 쌓은 석축성(石築城) 아래에는 큰 석재를 놓고 위로 갈수록 차츰 곡선을 줄이는 축조법을 쓰고 있어 견고 하고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적지는 대부분 사라지고 없지 만 지금도 그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유적들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고, 특히 국내성의 축 조방법은 조선 후기까지 우리나라 성곽의 주류로서 계승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를 태운 버스는 갑자 기 시내 한복판 하천이 있는 가장자리에 차를 세웠 다. 그리고 우리를 내리라고 하는데 내려보니 하천을 따라서 사람 키 높이의 성벽처럼 보이는 나즈막한 돌 담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국내성 성벽이란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한문으로 國內城(국내성)이라 고 씌어진 팻말이 하나 꽃혀 있었다. 실망이 이만저 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400여년의 긴 세월을 중원을 호령하며 살았던 우리의 고구려가 이렇게 산산히 부 서지고 흔적마져 희미한 모습을 보고 고구려의 찬란 했던 모습을 기대했던 우리는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주변의 아파트 단지의 조그 만 돌담들도 대부분 허물어진 성벽들의 돌로 만들어 져 있었다. 아무리 자기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렇 게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유적지를 자신들의 부족했 던 과거를 분풀이라도 하듯 한낫 쓰레기 취급하는 중 국에게 치미는 화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분명하였다. 고구려는 이미 없어진 나라일 뿐이고, 남의 나라 손에 넘어간지 오 래이며 아무도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말할 수 없는 폐허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는데 우리는 무책 임할 따름인 것이다. 심양에서의 마지막 일정 심양은 우리에게 봉천이라는 옛 이름으로 더 다가 오는 도시다. 원래 이름이 심양이었던 이곳은 청나라 때 봉천, 국민당 정권 때 심양, 일제의 만주사변 후 봉천, 공산정권 통일 후 심양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가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 도읍 했던 이곳에는 고궁 등 청나라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 이 남아있다. 병자호란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와 있었으며 조선시대 연행사가 북경에 오기 전 들르게 했던 곳이라 우리와 관련된 유적지도 많다. 특히 일제시대 때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독립 투사의 투쟁무대였고 지금까지도 약 10만 여명의 조 선족이 살고 있다. 이어서 우리는 요령성 박물관에서 우리가 추측했 던 대로“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분리된 주몽이 나라를 세워 주로 중국 동북부지역에서 활동한 중국변방민 족”이라는 내용을 확인하고, 1931년 9월 18일 일본 의 관동군이 남만주철도의 유조호 구간을 폭파하고 중국의 소행으로 조작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시 발점이 된 역사의 현장인 9.18역사박물관 관람을 끝 으로 중국연수 일정을 모두 마쳤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번 중국여행을 통하여 중국의 동북공정 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뼈저리게 느 꼈고,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자랑스러운 고구려 역사 를 송두리째 도둑맞을 수도 있음을 자각하여 더 늦기 전에 이에 대응하는 무엇인가를 찾아서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해병대 해병대 대령으로 퇴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