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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November 2009 | 해병대 I 장병 가족수기 / 문예활동 석에 달라붙어 하얀 눈이 햇살 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파란 하늘과 얼굴이 환히 비추어 보 일 것 같은 맑디맑은 천지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져 이는 분 명 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경관 이었다. 아!! 여기가 우리의 조상 단 군께서“홍익인간(弘益人間)” 이라는 건국이념으로 나라를 세우고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 온 시발점이 아닌가. 나도 모 르게 내가 우리의 성산(聖山) 백두산 정상에 와 있다 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속에서 불기둥이 솟아 오르면서 눈물이 앞을 가려 억제할 수가 없었다. 아!!! 역시 나는 한민족의 피가 흐르는 한국 사람임 을..... 백두산 천지는 일명 용암담 이라고도 하는데 면적 이 9.17평방킬로미터, 둘레는 14.4킬로미터, 평균깊 이 213.3미터, 최대깊이 384미터, 수면고도는 2,257 미터이고 여기에서 세갈레의 물줄기로 나누어지는데 우리가 잘 아는 두만강, 압록강, 그리고 중국으로 흐 르는 송화강이 있다. 고구려가 활짝 날개를 펴다 (두번째 도읍지 를 가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고구려 시대 중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고 가장 융성했던 제19대 광개토왕의 능 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이었다. 장군총은 높이 12.4미 터, 각 변의 길이가 31.58미터인 계단식 피라미드형 7층 무덤이다. 5단 중앙의 구멍을 통해 길이와 너비 가 각각 5미터, 높이가 5.5미터인 공간에 직사각형 석관 2개가 안치되어 있고 피라미드 정상부는 잘 다 듬은 약 50톤의 거대한 돌로 덮여 있었다. 보기만 하여도 우리 조상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중국과 자웅을 겨룰 만큼 그 웅장한 모습에 대고구려 당시의 위상을 느낄 수 가 있어 저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안 타까운 것은 이 장군총이 1931년 9월18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 제에 의해서 완전 도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다음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일명 호태왕비를 관람하였다. 광 개토왕비는 414년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높이 6.13미터, 각 면 너비 1.5미터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 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금석문이며 오 랜 세월을 거치면서 손실된 것을 제외하면 현재 1,590자는 식별이 가능하다고 한다. 비문 내용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 부분에서는 고구려 건국 신화와 왕가의 내력과 호태왕의 생애, 그리고 비를 세운 목적을 간단히 기 록하였다. 둘째 부분은 호태왕 정복사업의 이유와 과 정, 그리고 결과를 열거하고 있는데, 거란과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시켜 신라를 구했 으며 동부여 등을 멸망시켜 정복한 지역이 총 64성 1,400촌이라는 내용이다. 셋째 부분은 왕릉을 관리 하는 수묘인호(守墓絪戶)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 기록 되어 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를 보면서 찬란한 우리의 고구려 역 사를 못난 우리 후손이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주변국 에 의해서 끊임없이 침략당하고 속박당한 역사가 한 없이 부끄럽고 송구할 따름이었다. 머리 숙여 사죄를 드리면서 조용히 그 자리를 물러났다. 다음은 고구려가 명실상부하게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었으며, 나아가 서는 수백년간 중원을 호령했던 자랑스러운 고구려 의 도읍지 국내성으로 향하였다. ▲ 광개토대왕비에서 기념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