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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98 군사연구 제130집 판단하고 있었지만, 저항의지만은 갖고 있었다. 김일성은 9월 27일 도당위원장 협 의회를 소집해, 지금의 후퇴는 ‘일시적 후퇴’일 뿐이라고 역설하며 각도당위원장 들에게 각 지역별로 식량과 물자를 소개하고 끝까지 유격투쟁을 펼쳐 항전할 것 을 촉구했다. 84) 미래의 북한 운명에 대해 희망을 잃은 것은 김일성만이 아니었 다. 슈티코프 역시 9월 말에는 북한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9 월 30일 모스크바에 미군이 북진하기 전에 소련 기술고문들의 본국 철수를 북한 과 협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85) 그가 사태를 매우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 기 때문에 제기한 문제였다. 슈티코프는 9월 28일과 29일 김일성, 박헌영과의 대 담에서 미군의 북진 가능성에 대해 묻는 김일성에게 최악의 경우에 대해 대비해 야 하고 38선 경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에게 직접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며 그의 의견을 물어왔을 때 그것은 북한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라고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였 다. 86) 또한 그는 전방의 악화된 상황 수습을 위한 방안에 대한 김일성의 조언 요 청에 대해서도 ‘부대의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조언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답했다. 거기에는 김일성의 허풍과 낮은 군사지도자적 자질에 대한 슈티코프의 실망도 한몫 했다. 그는 이렇게 본국에 보고했다. 예전에 그는 아무런 문제없이 군을 조직적으로 후퇴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내에는 군기문란과 명령불복종 사례가 만연하 여 적은 아군 제1군집단을 분단시키고 문경과 제천을 돌파함으로써 제2군집단마 저도 분단시키고 있다. 87) 84) 김일성, 「일시적 전략적후퇴와 당단체들의 과업」(도당위원장협의회에서 한 연설 1950년 9월 27일), 김일성전집 제12권, 322~331쪽. 85) 「소련 외무성 제1부상이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보낸 보고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 소련 전문가들과 소련 기관 직원들의 소환 절차에 대한 결정 초안, No. 182-Sh, 1950년 9월 30일」,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53년 , 157~158쪽. 이에 대해 모스크바 에서는 북한 사람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허용하지 않다가 10월 6일에 가서 야 이를 허용했다. 같은 책, 158~160쪽. 86) 「슈티코프가 외무성 그로미코 동지에게, 상부 보고를 위해」(1950년 9월 29일), 한국전 쟁 관련 소련 극비 외교문서 (3) , 97~98쪽. 슈티코프가 북한지도자들이 소련군의 직접 참전 문제를 꺼낼 때 이에 대해 회피적 태도를 보인 것은 전쟁 전인 4월의 모스크바 비 밀회담에서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은 사실을 명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