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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96 군사연구 제130집 쟁 지도는 한심한 것이었다. 그가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소련군사고문단장과 함께 북한군의 실정을 파악한 바로는 낙동강전선과는 유무선이 불통이어서 전선 상황 이 최고사령부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무전차를 구동하기 위한 유류도 보장되지 못했다. 통신기재는 미숙한 통신병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었고 서울은 적에 의해 포위당해 있는 상태였다. 낙동강전선에서 적 부대는 이미 상주와 안동을 점령한 상태였고, 그 선두의 탱크 부대가 충주로 향하고 있어 제1군집단이 포위당하는 것 은 시간문제일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전방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연락장교를 파견하는 것도 시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9월 26일 슈티코프와 함께 김일성과 박헌영과 면담했을 때 김일성이 전선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망연자실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일성은 전선으로부터 교신이 끊겨 상황 을 알 수 없다고만 할 뿐 전선에 연락군관이라도 파견하여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 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있었다. 자하로프 장군은 김일성에게 즉시 연락 군관을 내보 내 전방 상황을 파악할 것을 촉구했다. 이날 대화에서 김일성은 차후 대책에 대해 9월 17일에 그가 구상했던 안, 즉 남한에서 징집한 청년들로 9개 사단을 창설하고, 북한에서 징집한 청년들로 6개 사단을 창설하여 장기전을 치르고자 하나 전선상 황으로 인해 남한에서의 9개 사단 편성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 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과의 무선교신은 되지만 최용건이 보고를 하지 않아 서울 방어의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자하로프는 김일성에게 남한 청년들을 동원해 9개 사단을 편성하는 안은 현실성이 없으니 기각하고, 북한에서 6개 사단 을 편성하는 안을 실행하되 이 사단들에 대한 무장과 훈련을 강화할 것을 엄격히 시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한 김일성이 최고사령관과 민족보위상을 겸할 것과 최고사령부가 실질적으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확장된 참모부를 갖게 해야 한다는 안에 찬동했다. 77) 자하로프는 이 내용을 본국에 보고했고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의결로써 추가적인 6개 사단 창설을 위한 장비를 10월 5일부터 20일 사이에 북한으로 보내줄 것을 결정했다. 78) 아마도 UN군의 서울 점령 소식에 의해 충격을 받았는지 슈티코프 대사는 9월 77) 「북조선 주재 소련군 총참모부 대표가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보낸 전문, 조선 전선의 상황에 대하여, 평양에서, No. 1298, 1950년 9월 27일 12시 35분」, 국사편찬위원회 편역,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53년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006), 148~149쪽; Torkunov, Zagadochnaia voina, pp.85~86. 78) Torkunov, ibid.,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