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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95 예천-안동-영덕 선에서 방어로 전환하여 적의 진출을 이 선에서 저지하라는 명 령을 내렸다. 75) 그것은 대전-낙동강상류 선에서 전선을 일직선으로 정리하겠다는 작전의도가 표명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제1기병사단은 이미 김천을 점령하고, 1개 보병연대(제7기병연대)와 1개 포병대대(제77포병대대), 1개 전차중대로 구성 된 제777연대전투단은 상주, 함창을 통과한 뒤 급속히 질주하여, 그 선두부대는 이미 천안에 도달해 있었다. 76) 인민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은 전선 상황에 어두운 상태에서 도상에서 내려진 때늦은 것이 되었다. 이날의 인민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은 두 가지 점을 말해 준다. 첫 번째는 인민 군 최고사령부가 미 제10군단의 서울 포위망이 형성된 이날까지도 서울의 위기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인민군 최고사령 부가 이전에 전선사령부에게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북상시키라’고 한 것은 모스 크바에서 내린 ‘4개 사단 북상’ 지시에 대해 형식적으로 대응했을 뿐, 서울 이남 대전 부근의 일정 지역으로 철수한 뒤 전선을 안정시켜 차후에 다시 ‘반격’을 해 보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달되지 않았지만 최고사령부에서 논 의된 9월 23일자 명령 초안의 내용은 그러한 인민군 최고사령부의 의도를 읽게 해준다. 그러나 이미 영등포와 노량진이 9월 21일 UN군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서울-김천간의 북한군 주보급로가 차단되고 유류 및 포탄 등의 물자 수송과 공 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무슨 수단으로 반격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인가? 인민군 최고사령부와 그 사령관 김일성은 서울의 전선 상황, 북한군 군수 문제를 도외시 한 채 꿈을 쫒는 탁상공론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Ⅳ. 북한 방어에 대한 소련의 직접 개입 스탈린은 소련군 총참모부를 통해 내려 보낸 지시에 북한이 귀를 기울이지 않 은 채 미 제10군단이 서울을 점령하도록 작전지도(作戰指導)를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소련군 참모차장 자하로프[가명 마트베예프] 장군을 평양에 특사로 내보 냈다. 9월 25일 평양에 도착한 자하로프에게 비친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전 75) Zhurnal, 1950년 9월 25일자; Voina v Koree 1950~1953, p.129; Torkunov, Zagadochnaia voina, p.86. 76)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상)(서울: 국방군사연구소, 1995), 456~4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