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page

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94 군사연구 제130집 이 점령당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았고, UN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북한으로 진격해 들어올 가능성에 대해서는 더더욱 내다볼 수 없었다. 그가 9월 23일 평양에 모란봉 지하극장을 새로 설계하는 문제를 놓고 설계책임자들에게 “극장천정을 궁륭식으로 하고 벽과 바닥을 모두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극장이 웅장하고 무게가 있으면서도 경쾌한 감이 나게 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공사를 앞당겨 다음해 5·1절까지 완공하라고 한 것 74)은 전선의 위기 상황을 인식 하는데 얼마나 무신경했는가를 대변해준다. 그 동안 서울에서 북한군 부대들은 처절한 방어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9월 20~ 21일간의 격렬한 전투 후에 영등포가 함락되었고, 9월 19일에 행주를 도하한 미 제5해병연대가 서울시가의 서측방으로 진격해갔다. 최용건의 서해안사령부는 후 방에서 도착한 모든 부대를 동원하여 연희동 주변의 과거 일본군 훈련장에 참호 를 깊게 파고 미 해병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곳에 투입된 북한군 제25교 육여단은 미 5해병연대와 국군 제1해병연대에 심각한 손실을 입히며 9월 20일부 터 24일까지 서울 서측방을 방어했다. 그러나 9월 21일 미 해병제1연대가 영등포 와 노량진을 점령한 이후여서 서울과 남쪽전선과의 연결은 끊겼다. 미 제1해병사 단을 후속해 들어온 제7사단은 9월 20일부터 안양을 공격함으로써 서울과 남쪽 전선의 북한군은 더욱 멀리 분리되었다. 서울 서측방에 대한 방어는 매우 완강했 지만, 서울 방어부대들은 서울 남측을 방어할 부대가 부족했다. 미 제10군단장 아 몬드는 이를 노려 9월 25일 미 제7사단 병력들과 국군 제17연대를 한남동과 뚝섬 으로 도하케 함으로써 북한군의 방어 배치가 취약했던 남산과 응봉, 그리고 서울 동북의 능선을 점령하고 서울 시가로 포위망을 좁혔다.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북한군은 시가지의 바리케이드와 건물을 이용하여 마포에서부터 서울 중심부에서 격렬한 시가전을 벌이며 서울 동북쪽으로 서서히 퇴각했다. 전투는 9월 28일까지 도 계속되었다. 전선사령부와 교신이 끊겨 있던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9월 25일 전선사령부와 잠시 동안 무선통신이 개통됨으로써 낙동강 사단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9월 25일에 김일성은 제1군집단사령관에게 ‘대전 방향’으로 후 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날 19:00에는 제2군집단사령관에게 김천-상주-함창- 74) 김일성, 「모란봉지하극장을 훌륭히 건설하자」(모란봉지하극장 설계도면을 보고 설계일군 및 평안남도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1950년 9월 23일), 김일성전집 제12권, 319~3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