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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92 군사연구 제130집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68) 이 무렵에 제2군집단사령관은 탱 크부대인 제17땅크여단을 먼저 영주로 철수시킨 후 퇴로를 엄호하게 하고 주력의 철수를 꾀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9월 공세 초에 보유했던 44대의 전차 중 대부분의 전차를 잃고 불과 전차 6대와 자주포 2대, 1~2일분의 유류를 갖고 있 던 제17기계화사단장 정철우 소장은 제2군집단사령관으로부터 영주를 장악하여 제2군집단의 후퇴를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9월 26일 영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16시에는 이미 국군 제8사단이 풍기를 점령하여 퇴로가 차 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아있는 전차와 자주포를 스스로 파괴한 뒤 9월 26일 지휘부만 태백산맥을 넘어 단양으로 철수했다. 69) 제2군단 예하 사단들은 중장비 를 모두 파괴하거나 포기하고 소그룹으로 나뉘어 산길을 골라 국군 추격부대의 추격을 따돌리며 제천-원주 방향으로 철수해야 했다. 미 제10군단이 무서운 기세 로 서울로 진격해오자 소련과 중국에서는 서울 점령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온갖 방책을 고려하고 있었다. 육군장관 바실리예프스키 원수는 9월 21일 스탈린에게 약 40대의 Yak-9 전투기들로 구성된 소련공군 1개 연대를 평양 상공 엄호를 위 해 북한에 파견하는 것을 건의했다. 이틀 후 그는 스탈린에게 항공기 기종을 La-9 40대로 바꾸어 10월 1~2일까지는 이 항공연대가 평양에 도착하도록 하겠 지만, 소련조종사들이 러시아어로 교신하게 됨으로써 미국이 소련 공군의 참전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70) 하지만 이 계획은 현실화되지 않았 다. 두말할 것도 없이 스탈린이 그로 인해 미국과의 대전쟁에 빠져드는 것을 두 려워했기 때문이다. 71) 68) 위의 책, 391쪽. 69) 라주바예프 보고서 제2권, 34~35쪽. 이 책에서는 제17기계화사단(제17땅크여단)의 영 주로의 이동이 9월 22일이라고 되어 있으나 마지막까지 풍기에 있다가 포로가 된 17땅크 여단의 강희구 중위의 포로진술에 의하면 여단이 영주에 도착한 것은 9월 26일이었고, 사단장은 그의 측근들이 참모장 정강대좌에게 지휘를 맡기고 풍기를 떠났다. 제17땅크여 단 강희구 중위 포로진술. FEC, ADVATIS-1142 (13 Oct 50). 작전상황으로 보아 강희구 중위의 진술이 정확하다. 70) 러시아연방대통령문서보관소 문서군 3, 목록 65, 문서철 827, 79~80, 81~82쪽. 71) 러시아 항공연대의 북한 파견 계획은 이때 스탈린에 의해 중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 련은 대신에 MiG-15기로 구성되어 이해 7~8월에 연해주에서 심양으로 옮겨간 제151전 투비행사단으로 하여금 11월 1일부터 압록강 상공을 엄호하는 작전을 펴도록 했다. 한편 소련 공군대좌 페트라초프는 조선인민군 공군의 군사고문 자격으로 단동비행장에 있던 북한군 공군의 Yak-9 24대와 새로 양성된 비행사 26명을 지휘해 10월 말부터 압록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