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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91 인 제1기병사단이 왜관을 점령하고 그 북쪽에서 국군 제1사단이 돌파구를 확장하 자 북한군 부대들은 급속히 무너졌다. 사실상 북한군 사단들은 아래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 부하였던 최용진이 지휘하던 제13사단에서는 사단장의 무모한 지휘에 대한 항명 사건과 고급 군관들의 UN군 투항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이미 8월 29일에는 포 병연대장 정봉욱 중좌가 UN군측에 귀순해버렸다. 9월 19일과 20일 사이에는 사 단참모장이었던 리학구 총좌가 부하를 돌보지 않는 최용진 사단장의 무리한 명령 에 반발하여 권총으로 사단장을 쏘고 다음날 UN측에 투항했다. 최용진은 부상당 했으나 생명은 건졌다. 그 후로도 제13사단의 주요 지휘관들이 계속 투항했다. 64) 그러나 제13사단에서만 항명과 명령불복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제2군집단사령 관 무정은 권총을 빼들고 진지를 고수하라고 예하 지휘관들에게 고함쳤지만 연대 장들이 먼저 진지를 포기하고 철수해버렸다. 65) 유사한 사건들이 많은 부대들에서 일어났다.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낙동강전선의 전사들에게 미군의 인천상륙 사실 을 절대 알리지 말라고 엄명하였으나, 이미 9월 18일 경에는 그 소식이 소문이 되어 전 사단들에 확산되어 부대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9월 21일 경에는 많은 부 대들이 뿔뿔이 분산되어 국군과 미군의 추격에 쫓기며 소그룹을 이루어 산길을 통해 철수했다. 9월 21일에 대구 동북 전선 지역이 돌파될 위기에 직면하자 제2군집단사령관 은 그의 예하 제13, 제1, 제8사단에게 군위에 대한 반격을 명했지만 이미 이 시점 에는 명령이 예하부대에게 먹혀들어가지 않았고 국군 제2군단의 공격을 받아 전 선이 붕괴되었다. 66) 이날 김책은 제2군집단(군단)에게 “군 병력을 낙동강 북쪽 강변으로 후퇴시켜, 함창, 예천, 안동, 공정동, 영덕 선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 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67) , 그것은 이미 조직적으로는 실행되기 어려운 명령이었 다. 전선사령부는 9월 22일 제1군집단(군단)에게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대전 64) 유독 제13사단에서 고급군관의 투항이 많았던 것은 제13사단장 최용진의 무단적인 지휘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다음은 제13사단의 투항 군관들이다. 자주포대대장(9월 24일), 군 의부장(9월 27일), 제21연대장(10월 1일), 제19연대장과 169명의 부하들(10월 3일). 일본 육전사연구보급회, 한국전쟁 5: 유엔군의 반격과 중공군 개입 , 141쪽. 65) 주영복, 내가 겪은 조선전쟁 제2권, 62쪽. 66) Voina v Koree 1950~1953, p.127. 67) 라주바에프 보고서 제1권, 3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