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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90 군사연구 제130집 정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과 모호한 명령 전달로 인해, 적시에 낙동강전선으로부 터 전투력이 있는 사단들을 서울 지역으로 전환함으로써 서울 방어를 강화하며 이의 엄호 하에서 낙동강전선의 주력 사단들을 철수시킬 가능성은 사라졌다. 가장 큰 책임은 물론 전쟁의 대국적인 상황을 판단하고 이에 입각해 명령을 내리고 그 집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했던 최고사령관이 져야 할 문제였다. 더욱이 심각한 문제는 9월 21일, 23일, 25일 잠시 동안을 제외하고 9월 20일부 터 9월 29일까지 낙동강 전선의 전선사령부, 군집단사령부와 최고사령부간의 통 신 연락이 단절된 것이었다. 김일성의 최고사령부는 서울전선에서의 전황은 보고 받을 수 있었지만 낙동강전선을 통제하고 있었던 김책의 전선사령부 전방지휘소 (김천)와는 교신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다만 소련군은 북한군 무선통신 을 감청함으로써 어느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 었다. 62) 낙동강전선에서 김책은 미 제8군의 전면적인 반격작전에 맞서 예하부대에게 완강한 방어선 유지를 강조하며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9월 18일 제2군집단 (군단)에게 왜관 지역을 사수할 것과 현 전선을 유지하도록 엄명하는 한편, 제1군 집단(군단)에 대해 우선 가장 남쪽에 있는 부대부터 회전하듯이 대전(금강선)까 지 이동시킴으로써 전선을 포항-왜관-금강선으로 일직선을 만든 뒤 서울의 방어 부대와 연결하고자 했다. 63) 김책은 구체적으로 제1군집단(군단)에게 예하의 제6, 제7사단을 우선 철수시킬 것과, 제9, 제4, 제2사단은 예하부대들을 거창을 향해 20일 밤에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일부 부대들은 이미 18~19일 낙동강 동안 진지를 포기하고 낙동강 서안으로 이동했다. 9월 19일 국군 제1사단의 공격 을 받아 왜관 동북쪽의 가산을 방어하고 있던 제13사단과 제1사단이 붕괴됨에 따 라 제1군집단과 제2군집단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는 한편, 미 제1군단의 주공부대 제로는 9월 8일 강건 폭사 이후 김웅은 전선사령부 총참모장이었고 제1군단장은 이전까 지 제4사단장이었던 리권무, 제1군단참모장은 제3사단 참모장이었던 장평산이 승진 임명 되었다. 제1군단 소속의 많은 군관들이 이러한 진술을 하고 있다. 백종윤 중위(제1군단 소속 공병군관), 안찬호 소위(제1군단 사령부 연락군관), 박규일 소위(제1군단 후방사령부 연락장교), 김문길 소위(제1군단 통신군관)의 포로진술 참조. FEC, ADVATIS-1174, 1084, 1028, 1029. 62) Zhurnal, 1950년 9월 20-25일자. 63) 중국군의 한국전쟁사 제1권, 180쪽; 일본 육전사연구보급회 편, 한국전쟁 : 제5권 유엔 군의 반격과 중공군의 개입 , 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