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page

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89 다. 57) 그러나 주영복은 포로수용소에서 그가 접촉했던 동료 북한군 군관들과의 대화를 통해 김책 대장이 제105땅크사단과 제9사단 제87연대에게만 서울로의 북 상명령을 내렸다고 말하고 있다. 58) 실제로 나중에 수원과 영등포에 도착한 낙동 강 전선의 부대는 제105땅크사단과 제9사단 제87연대뿐이었다. 두 부대는 인원으 로 보면 불과 3,000~4,000명 정도였고 탱크의 숫자는 불과 20대뿐이었다. 59) 이리하여 ‘4개 사단’을 급히 낙동강전선으로부터 서울 지역으로 북상시키라는 지시는 스탈린과 소련군 총참모부의 의도대로 실행될 수 없었다. 스탈린이 이 지시 를 내릴 때는 최소한 약 3만 명의 병력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9월 18일에 4개 사단에서 3개 사단으로 북상시킬 병력의 규모를 축소한 다음, 전선사 령관 김책에게 명령을 내릴 때는 매우 모호하게 ‘가급적 많은 병력’을 북상시키라 고만 하였다. 김책은 김책대로 전선의 유지에 크게 지장이 없는 부대들만 북상시 켰다. 자세한 상황은 불분명하지만 제9사단을 지휘했던 제1군집단사령관(1950년 9월 8일 이후 전선사령부 참모장) 김웅이 숙청당한 후 작성된 북한 공간사는 김 웅이 부대를 북상시키라는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집행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는데 60) , 김책이 제9사단의 북상 의견을 말했을 때 김웅이 병력부족을 호 소했고 그리하여 제9사단 전체를 북상시키는 대신 그 중의 1개 연대만을 북상하 기로 타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61) 결국 모든 수준에서 상급의 결 57) 허종호 외, 조국해방전쟁사 2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44쪽. 58) 주영복, 내가 겪은 조선전쟁 제1권, 502쪽. 59) 제1군단 공병군관인 백종윤 중위는 9월 27일 청주에 북상해 있던 제105땅크사단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이날 현재 제105땅크사단은 탱크 20대와 1개 보병대대를 보유하고 있었 다. 제1군단 공병군관 백종윤 중위 포로진술. FEC, ADVATIS-1174 (17 Oct 50). 제9사 단 제87연대(제3연대)의 인원수는 약 2,000명이었다. Montross and Canzona, The Inchon-Seoul Operation, p.325. 60) 김웅은 1957년에 숙청당했다. 그가 숙청된 후에 출판된 북한 공간사는 이 시기의 작전에 대해 “전선 서부의 인민군 부대들도 정면과 후방 익측으로 위협을 당하는 매우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완강한 방어 전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당시 전선 서부 지역의 아군 부 대의 책임적 지위에 잠입한 김웅을 비롯한 반혁명 반당 종파 분자들은 최고사령부의 작 전적 방침의 실현을 고의적으로 태공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과학원 력사연구소, 자유와 독립을 위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 (평양 : 조선 로동당출판사, 1959), 128쪽. 이것은 아마도 제9사단의 북상 지시에 대한 불이행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인다. 61) 주영복은 그의 포로수용소 내의 동료군관들로부터 김웅 중장이 욕을 하며 김일성의 명령 에 대한 거부의사를 표시했다고 그의 회고록에 쓰고 있다. 주영복, 내가 겪은 조선전쟁 제2권, 59쪽. 김웅의 당시 직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1군단장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